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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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였어? (152쪽)

 

정말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자신을 괴롭히던 동급생을 칼로 찌른 뒤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을 읽은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이전에 그 여자와 이미 사랑에 빠졌었던 남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주 알’이 몸속으로 들어온 남자. 분명 이렇게 그는 실재하는데 실재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를 지켜봤는데 한낱 꿈에 불과한 것 같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시공간연속체를 보는 존재’로 자신의 죽음을 알고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까?

 

오래된 나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보며 서 있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을 나무를 상상하면 기분이 묘해지곤 했다. 그러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자가 어떤 장소에 가면 그곳에 얽힌 역사가 보이는, ‘시공간연속체’의 능력(연장으로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나무를 보며 품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남자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것처럼 느껴졌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도 보였다. 어쩌면 그 자신도 이 세상에 잠시 머물고 있는 존재의 ‘연속체’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게 다 뭔 소린가 싶었다. 남자가 저지른 일이나 여자와 함께한 추억들은 특별하긴 했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우주 알’이니 ‘시공간연속체’니 어떤 동네 이름부터 흘러 온 역사 이야기까지, 그 모든 게 엉켜버리니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사실이고 허구인지 구별하려는 내 모습에 황망하게 웃고 말았다. 새벽녘에 떠서 곧 햇빛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그믐달처럼, 아무도 그 남자를, 이 이야기를 관측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만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면 도무지 어떻게 전해야할지 난감해서 혼란스러웠다.

 

그 가운데 남자 이외의 인물에 대해선 어느 정도 또렷했지만 남자는 더 또렷하게 존재하고 있는데도 곧 사라져버릴 것처럼 불안했다. 미래를 볼 수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을 예감했기에 그렇게 담담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무섭진 않았을까, 슬프지 않았을까,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죽였던 동급생 어머니를 위해 남겨둔 장치조차도 너무나 쓸쓸해서 미래를 보는 능력이 다 뭐냐 싶었다. 자신 앞으로 남겨진 거액의 보험금을 탐탁지 않아하는 형사들 앞에서 ‘그냥 그 새끼가 제 옆에 있어주길 원했다고요!(150쪽)’ 말하는 여자의 절규만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같았다. 정녕, 무엇이 어찌되었든 간에 그냥 여자 옆에서 함께 살아가면 안 되었던 것일까? 죽음을 앞두고서였지만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중략) 고마워. 진심으로.(148쪽)’ 이렇게 고백했으면서 도대체 왜!

 

어쩌면 그 남자는 이 세상에서 끝나 버렸지만 자신이 얘기했던 시작이 없다던 우주처럼, 볼펜의 모든 면이 다 끝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작도 끝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시공간을 이동한 것 뿐, 그가 존재했던 시간들을 우리가 알지 못할 뿐, 아무도 모르게 여자 곁에 혹은 우리 곁에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도무지 이 남자의 이야기를 흘려 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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