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해외문학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순순히 찾아서 읽었을까? 이름도 태생도 생소한 작가이기에 더 그러했고 어떤 계기가 되었든 저자의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이 책에 실린 첫 단편을 읽는 순간부터 저자의 작품을 좋아하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고 좀 오랫동안 읽은 셈이지만 조금 새로운 저자의 단편들에 빠져들었다. 장편도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들어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삶에 밀착되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재미를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뚝뚝 끊기는 느낌도 싫고, 결말이 대부분 모호하게 끝나, 단편을 읽는 게 영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조정래 작가 선집을 통해 단편에 대한 편견을 깨게 되었고 그 뒤로 종종 단편을 읽어왔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단편의 매력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나에게 소설을 왜 읽냐는 질문을 종종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망설임 없이 현실 도피를 위해서라고 말했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같은 내용을 만나기 싫어 고전을 찾아 읽으면서 철저히 현대소설은 외면했었던 것 같다. 우울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다 조금씩 외면을 철회했고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위로를 얻었다. 완전히 현대문학에 대한 마음이 열린 것은 아니지만 소설 속의 삶이 도피성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내가 피하고 싶었던 현실의 삶과 많이 닮아 있음에서 오는 위로였다.

  이 책은 저자가 1950년대부터 15년 동안 써 온 글을 모아 처음 낸 단편집이라고 했는데 몇몇 시대적 배경을 제외하고는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나에게 생소한 캐나다 작가의 작품에다 캐나다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더 매력 있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뭔가 특별할 것 같은 일들도 있지만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묘사가 좋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느새 내가 피하고자 했던 삶에 더 한 발짝 다가간 느낌이 들었고 지난하게만 생각했던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문구를 이 소설들을 통해 이제야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일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거요. 헬렌 혼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도요.「그림엽서」중

  내가, 혹은 우리가 함께 살아내고 있는 삶에는 ‘언제나 끊임없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살아가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삶에 동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떠한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35년을 살아오면서 늘 서투르기만 했던 짧은 내 삶을 되돌아보면 자양분을 쌓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내가 뭔가가 되어 있거나 좀 더 나아진 환경 속에서 살아갈 거라 착각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러한 결과물을 내는 것 역시 ‘나’의 한 요소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자신만의 명확한 고집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종종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저자의 이 작품 역시 뭔가 결론이 시원하게 드러나거나 희망을 그려낸다거나 나도 저렇게 살아봐야지 하는 되돌아봄은 거의 없었다. 있는 그대로 삶의 단편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옮겼을 뿐이다. 그래서 때론 당황하기도 하고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있는 그대로 그네들의 삶을 받아들이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의 문체와 세밀함이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지만 번역임에도 꼼꼼하면서도 독특한 표현들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읽으면서 ‘우리말에 이런 표현도 있었나? 역자는 어떻게 이렇게 번역할 생각을 했을까?’란 생각부터 심지어 원문이 궁금해지기도 했다(비교해 봤자 분간해 낼 능력은 내게 없지만!^^). 그만큼 신선한 표현력과 애정이 담긴 번역 덕분인지 읽는 내내 다채로운 느낌을 받았다.

  단편집의 느낌을 남긴다는 건 장편소설보다 더 어렵다. 그렇기에 두루뭉술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을 주절이주절이 떠들긴 했으나 이 책과 함께 구입한 저자의 다른 작품도 곧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 대한, 단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바꾸고 더 알아가고 싶게 만드는 이런 기분. 소설을 읽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며 그런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란 문학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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