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6
이홍섭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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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는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무기력감과 권태가 나를 짓눌렀고 친구들을 만나면 수다스러웠지만 가족이나 낯선 이들 앞에서는 침묵했다. 좀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었고 내가 그 곳에 속하게 되면 고향이란 공간의 진부함을 털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향했고 6개월 만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잃은 게 더 많은 채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고향에서의 삶은 더 무기력해지고 참담했다는 게 내 기억이다.

  그 실패 이후로 다시는 고향을 떠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 내가 20대도 아닌 30살 여름,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20대 때 그렇게 갈망했던 대도시가 30대의 나에겐 두려움의 대상이고, 적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살 곳, 내가 일할 곳이 확실해 환경의 어려움은 없었지만 마음의 어려움이 늘 잠재했다. 일을 하면서 이 직장을 떠나면 아무런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내가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결혼을 했지만 그 뒤 얼마 안가 직장을 관두게 되었고, 임신으로 찾아 온 고향에 대한 향수를 견디지 못해 남편과 함께 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 순전히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때문이란 걸 // 이 아침은 깨우쳐주네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중

  저자처럼 내가 고향에 돌아오고 싶었던 또렷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고향이 주는 안락함과 가족이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대도시의 치열함을 달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과 가족이 30대가 되어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고, 고향에 돌아오자 마음 깊숙이 자리한 그리움의 불안감은 사라졌다. 이 모든 기억이 저자의 시를 읽으면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대도시와 나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그곳의 치열함을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향에 돌아와 소소하게 살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기로 했다.

누군가 떠나고 // 누군가 다시 돌아오는 이 터미널

<터미널 5> 중

  고향으로 돌아올 때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면 고향의 문턱을 밟은 나의 감회가 분명 달랐을 거라 생각한다. 수없이 이용한 버스터미널. 기차역과는 달리 버스터미널이라는 공간의 애잔함과 쓸쓸함과 남겨진 자와 떠나간 자의 발걸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곳. 왜 그런지 내가 경험한 고향의 버스터미널은 그런 느낌이었다. 20대에 장거리 연애로 버스터미널을 들락날락하며 하루의 다양한 시간의 터미널을 경험해서인지 버스터미널은 나에게 그런 이미지로 남아있다. 저자의 시를 통해 내가 막연하게 느낀 감정들이 배어나오는 것을 보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꼈다. 저자의 시선과 표현들이 나의 느낌과 완벽히 맞닿아 있다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터미널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느낌은 어느 정도 통한 것 같았다.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 (중략) //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 불빛을 잘못 보고 //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등대> 중

  이 구절을 읽으며 떠나간 사랑, 떠나 온 사랑에 대한 회한을 담기도 했다.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을 내가 이제는 한 곳에 정착한 배가 되어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이 아닌 내 삶을 대입해보면 내가 현재 낯선 항구에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 또렷하지 않지만 방향이 잘못 되진 않았는지 자주 점검하는 편이다. 그런 점검의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내용물이 없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려는 마음만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시집이 그 역할에 약간의 지표가 되기도 했다. 시는 늘 나에게 어렵고 저자가 그려놓은 이미지에 늘 겉돌기만 했었는데 자신의 삶을 작은 목소리로 묵묵히 드러내는 이 시집의 서정성이 나의 마음까지 위로해 주었다. 이 시집을 읽으며 현재와 미래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 과거를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기회가 된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꼭 어려운 시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용기를 북돋워주어서 다른 시집에도 기웃거릴 여유까지 만들어 준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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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의 흔적이 배어있는 문장, 저는 이런 시를 좋아합니다. 시인의 성함이 생소한데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

안녕반짝 2015-02-10 23:18   좋아요 0 | URL
저도 생소한 시인이었는데 그나마 서정시여서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시는 여전히 어려운 분야지만 이런 시집을 만날 때면 시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열리는 것 같아요^^

2015-05-06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