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좋아했던 것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2
미야모토 테루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연애를 많이 해보진 않았지만 지나온 연애를 떠올려보면 각각 색깔이 달랐음을 알게 된다. 첫사랑은 무조건 주려다보니 너무 서툴렀고 두 번째 사랑은 받기만 했고 그 다음은 들떠서 쉽게 끝나버린 사랑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게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면서 처음 가졌던 순수했던 마음은 사라져버렸고(그 마음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 같다.) 어느새 능글능글한 사랑을 따지게 되는 30대 중반이 되어 버렸다. 엉뚱한 계기로 함께 살게 된 네 남녀의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경험했던 이런저런 사랑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현재 내 안에 자리 잡힌 능글맞은 시선으로 그 사랑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조금은 씁쓸해졌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 공단주택에 살게 된 조명 디자이너 요시는 두 명 이상의 가족인 동거자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채울 수 없어 특이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친구 당나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당나귀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며 어머니의 거주지를 옮겨오라고 한 뒤 자신과 함께 살자고 한다. 늘 단칸방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요시나 당나귀에겐 공단주택이 고급맨션처럼 느껴져 놓치기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대략 그렇게 서류처리를 하고 이사를 하고 간단하게 한 잔 하러 들른 술집에서 아이코와 요코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술기운에 그들과 함께 살기로 약속했다는 말과 함께 그들의 주택에 짐을 싸들고 온 두 여자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함께 살게 된 계기란 것이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지만 겹치지 않고 서로 맘에 드는 짝을 찾아 한 방을 쓰게 된 그들을 보며 과연 이 사랑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됐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시원하게 행복한 결말이 날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요시는 불안신경증을 앓고 있는 아이코와 연인이 되었고 곤충을 카메라에 담는 사진작가 당나귀는 미용사 요코와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함께 살면서부터 금세 하나의 공통점이 드러났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지나치지 못하고 돕는 일이었다. 당나귀가 알게 된 퇴학당한 고등학생 네 명부터 시작해서 머리는 좋지만 등록금 때문에 명문대 입학을 포기하고 평범한 회사를 다니며 불안신경증을 앓고 있는 아이코, 과거에 사귀었던 남자와 우연히 재회해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요코를 위해 그들은 빚을 만들어서라도 도왔다.

  아이코가 앓고 있는 병 때문에 회사를 관두고 의대진학을 적극 권한 그들은 아이코를 위해 등록금 통장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돈이 모이지 않았다. 아이코와 결혼하기 위해 어머니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등록금을 해결한 요시에게 아이코는 힘든 과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대로 곁에 머물러줄 줄 알았다. 그 사이에 과거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 요코는 그 남자를 위해 목돈을 이들에게 빌리고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낙태까지 하며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는 당나귀까지, 기묘한 동거의 시작만큼이나 그들이 어떤 사랑의 결실을 맺을 지 알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아이코와 요코는 요시와 당나귀에게 소위 말하는 나쁜 여자였다. 둘에게 상처를 많이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이코와 요시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져버리고 아이코는 의과대학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한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용서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은 건 요시와 당나귀 커플이다. 요코를 용서하고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보기 위해 오지에 가서 목숨 건 경험을 하고 와서 맺어진 사랑이기에 숱한 과정이 있었지만 더 값져 보였다. 하지만 아이코의 다른 사랑은 쉽게 동조하기 힘들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고 특히 요시 어머니의 도움으로 의과대학까지 입학한 그녀였기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을 덮고 나서 자꾸만 아이코와 요코의 행동들이 못마땅했다. 그래선 안 되었다는 생각을 며칠 째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그런 이기적인 사랑을 한 적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제야 그녀들을 비난할 수 없음을, 화도 내지 않는 두 남자들에게 답답함을 느낄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찌 되었건 그들 나름대로의 사랑방식이었고, 그 사랑이 옮겨갔기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던 것뿐이다. 오로지 받기만 했던 내 사랑을 명확히 따져보자면 그 사람과 헤어져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고마움을 알면서도 내 마음이 변했다는 이유로 그와의 이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사람도 내게 비난은커녕 오히려 내 행복을 빌어주었다는 것에 이 두 남녀의 사랑을 그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나마 순수했던 첫사랑을 하고 있었을 때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이 네 남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다양한 사랑이 있다지만 난 이런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고 어설픈 결심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랑은 금세 빛바래고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세파에 닳고 능글맞아져서 과거의 과오를 통해 이들을 조금은 측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청춘 소설을 읽는 듯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이 책을 읽을 때보다 읽고 나서 며칠 동안 곰곰이 곱씹어 보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의미들을 찾은 셈이었다. 책 제목처럼 그들이 함께 살면서 좋아했던 것을 떠올리고 그것을 추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랑을 한 충분한 대가가 되었다는 나름대로의 결론도 낼 수 있었다. 그러자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든, 아니면 미래에 찾아올 사랑이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을 예측하지 말고 과정에 충실한 사랑. 그럴 때 그 사랑이 좋았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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