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테르마이 로마이 1~3 세트 - 전3권
야마자키 마리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초등학교 때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갈 때면 순간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늘 상상했었다. 집과 학교의 거리가 무려 1시간 정도였고 버스 시간도 맞지 않아 늘 걸어 다녔다. 6학년이 되기 전까진 동네 언니 오빠들이라도 있었는데 다들 졸업을 하고 나자 나 혼자 남아 늘 되돌아가야 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늘 순간이동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다 어른이 되자 무언가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잠재력이 툭 튀어나오길 바라게 되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라게 되는 초능력이 달라지는 것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런 힘이 존재한다면 빌리고 싶은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이 책의 주인공 루시우스도 그랬다. 고대 로마인인 그는 목욕탕 건축기사지만 아이디어 고갈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여행을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칩거했겠지만 그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목욕탕에 가는데 그곳에서 현대 일본의 목욕탕으로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 목욕탕 바닥의 구멍을 통해 현대 일본의 목욕탕으로의 시간여행. 그 일로 인해 루시우스는 영감을 얻게 되지만 다시 로마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목욕탕에서 현대의 일본으로 순간이동을 했던 것처럼 그가 로마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 또한 물이었다. 물에 빠지면 그는 고대 로마와 현대의 일본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가고 싶다고 물에 빠지는 게 아니라 그가 무언가를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얻어야 할 때, 물에 빠졌고 이동했으며 영감을 얻었다. 현대의 일본 목욕탕에서 본 것들을 로마에 접목 시키면서 그는 유명해진다. 그래서 황제의 총애를 받기도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그를 무조건 축하하고 추앙하는 무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를 시기질투하고 그가 만든 목욕탕 때문에 다른 목욕탕이 장사가 안 된다며 아우성이고 황제는 지친 육신을 쉬게 할 더 나은 목욕탕을 원했으며 그 외에도 일중독에 빠진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는 떠나는 일 등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목욕탕을 만들어야 하는 일과 현대 일본으로 건너가 영감을 얻는 일들도 계속 일어났다. 1권은 목욕탕 시간여행이라는 점에서 신선했고 2권에서는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들과 그 안에서 나름 잘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주류였지만 3권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자주 물에 빠지고 이동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현대 일본인과 너무 쉽게 의사소통이 통하는 것 등 조금 느슨해진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고대 로마의 목욕탕을 재연하려는 일본인 건축기사에게 영감을 주었던 모습에서는 심히 오글거리기도 했다.

  만화는 만화이기에 너무 꼼꼼하게 따지면서 보지 않으려 해서 나름 재미나게 읽었던 편이다. 중간중간 저자의 에피소드와 설명이 곁들어 있어 실재했던 로마의 목욕탕과 일본의 목욕탕 문화를 꽤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문득 내가 직장인이었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쥐 뜯을 때 루시우스처럼 순간이동을 해서 영감을 얻어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루시우스처럼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간절했던 그때. 지금은 방바닥에 누워 이 책을 보며 낄낄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심히 낯설다. 하지만 목욕탕에 가면 이 만화 내용이 떠오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또 다른 추억이 생긴 것 같아 나쁘지 않다. 책 내용이 내 경험이 되어가는 것. 그것도 나름대로 보람 있고 재미있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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