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숨결 - 개정판
로맹 가리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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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가벼운 소설을 읽다 보면 무겁더라도 생각할 거리가 있는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장을 한참 바라보다 이 책을 충동적으로 꺼내 들었다. 로맹 가리란 작가의 작품과 그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는 데서 오는 의아함 때문이었다.『자기 앞의 생』은 정말 흡인력이 있었음에도 읽다가 덮어 버렸다. 소설 주인공이 처한 환경이 암울해서였다. 그런 뒤에『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책장에 들여놨음에도 그 두 권의 작품이 아닌 이 책을 꺼내든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두 작품보다 그나마 덜 들어본 작품이었고 미발표 유작이 있어서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미발표 유작에 끌린다는 사실이 조금 부조화스럽긴 말이다.

 

  첫 단편「폭풍우」를 읽으면서 이 책을 읽게 된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렬하면서도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마력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접한다는 우쭐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단편집이 주는 블랙홀에 금세 빠져 버렸다. 단편집은 장편이 주는 긴 느낌 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여러 이야기를 만나다 보면 이야기를 모두 떠올리기도 힘들고 한 작가의 작품이라는 특성도 들춰내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푹 빠져 드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떤 작가를 처음 대면하는데 그 작품이 단편집이라면 다음 작품을 읽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상당한 고민이 든다. 더군다나 어찌어찌하여 책을 다 읽었다고 해도 느낌을 남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애로사항 중의 하나다.

 

  이 단편집을 읽었지만, 첫 단편집을 읽고 단박에 마음에 들어 다음 이야기까지 읽어나갔지만 단편집이 주는 다양함의 늪에 빠져버렸다. 순문학의 광활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를 읽어나가고 있지만 시간에 점령당한 듯한 느낌에 젖어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지나치게 많은 단어들이 쏟아지곤 한다. 형용사가 빗발치고 부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내린다. 그건 로맹 가리가 지닌 매력의 일부이다.’ 라는 서문의 말에 공감하듯이(미처 형용사와 부사를 구분 짓지 못하고 뭔가 집중이 안 된다고만 느꼈을지라도!), 로맹 가리의 매력에 빠지기 전에 표현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문학이라는 영역 내에서 로맹 가리는 일종의 사륜구동 자동차와도 같았다. 그는 온갖 장르를 누비고 다녔다. 그는 소설, 자서전, 대담, 드골에서 바치는 송시, 두 차례의 콩쿠르 상, 영화 시나리오, 한 번의 속임수와 여려 개의 필명을 남겼다. (서문 중에서)

 

이 표현이 딱 맞다 싶을 정도로 단편집임에도 온갖 이야기를 누비는 느낌이었다. 두 편의 단편이 완성된 단편소설이 아니라 미완 소설의 초고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때론 섬세하게 때론 거칠고 모호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에 혼미해진 게 사실이다. 전쟁의 추억담을 이야기하다가 십 년 뒤 전쟁이 끝난 뒤를 상상해서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 헷갈리고 의문을 가졌던 이야기(「십 년 후, 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냐마 중사’란 인물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냐마 중사」, 그리고 무엇보다 결말이 궁금해 미완성 소설이라는 게 너무 아쉬웠던「그리스 사람」까지 이야기 속을 헤매고 다녔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이 단편집과 만나면서 로맹 가리의 작품을 드디어 읽었다는 후련함도 있었지만 숙제가 더 많아진 느낌이 든다. 내 책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대표작을 만나는 일. 그 두 작품을 만난 뒤 이 작품을 읽었다면 조금 더 이해하면서 친근하게 읽었을지 모르나 저자의 독특한 매력이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그 독특한 매력에 빠지느냐 한발 물러서느냐는 앞으로 만날 작품 속에 달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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