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그녀
부다데바 보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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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정의를 나름대로 구축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처음 사랑하게 된 사람을 첫사랑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처음 좋아했던 사람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짧게 짝사랑으로 그친 사람들이 많아 그들도 포함시켜야 하는지 늘 고민이었다. 그러다 온 힘을 다해 좋아한 사람을 첫사랑이라고 정하자 단박에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떠올려도 이젠 가슴이 설레거나 아련한 추억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라든가, 행복하게 살아라는 덕담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고 그도 나를 그렇게 좋아해 주었지만 이제는 상관없는, 이래저래 소식을 듣거나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런 마음을 갖기까지 거의 십 년이 걸린 것 같다. 영원하자는 말이 얼마나 쉽게 사라져 버리는지 깨달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고리타분한 내 첫사랑을 들먹이는 건 이 책 속에서 네 남자가 기억하고 있는 사랑 때문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비극이든 기쁨이든 당시의 절절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지, 그토록 세세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랑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부러움이 한꺼번에 일었다.

  그들이 간직한 사랑 이야기를 꺼내게 된 데는 한 쌍의 연인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의 기차 대합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각기 다른 네 남자는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대합실로 들어왔다 사라진 연인을 보며 한 때 그들처럼 애틋했던 때가 있었노라고 추억한다. 그렇게 그들의 첫사랑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세 남자의 이야기는 슬펐다.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당시의 절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왜 그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는지 모든 상황들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였다. 첫 번째 ‘마칸랄의 슬픈 사연’은 말 그대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있는 듯 여겨졌지만 결국 슬픈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머릿속에 그려질 듯한 집의 구조와 인물에 대한 묘사가 돋보였던 이야기로 교수의 딸인 그녀는 마칸랄을 왜 그렇게 싫어하고 쌀쌀맞게 굴었는지 제대로 들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사랑의 최종 목적지가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갖기도 전에 가족간의 미묘한 문제, 적절하지 못했던 시기들이 마칸랄로 하여금 그녀에게 제대로 된 고백조차 못해보게 했다. 드러내지 못할 짝사랑이란 말이 맞을 정도로 슬프게 끝나버린 이야기는 앞으로 세 남자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한다는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두 번째 남자 가간 바란의 이야기는 학창 시절이라면 누구나 그런 사람이 있을 법한 사연이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동생이나 내가 좋아하는 오빠가 있다는 것. 그 마음을 알면서도 싫다거나 좋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그 사람이 떠나버린 기억. 그리고 재회. 재회해보니 그 당시의 추억을 혼자서 너무 오래도록 좋을 대로 기억하고 있었나 하는 상념까지, 우리 곁에 자주 들어볼 수 있는 사연 같았다. 그럼에도 자꾸 어긋나는 마음이 안타까워 흔하지만 흔치 않는 이야기가 되는 과정이 마음을 절절하게 했다. 세 번째 남자 아바니란 남자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아내와 결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야말로 전혀 결혼할 것 같지 않을 사람과의 결혼이라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자신의 친구를 죽도록 사랑한 여자와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불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그렇게 변할 수 있고 돌고 돌 수 있기에 사랑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그나마 결말이 좋아 불안감 없이 마주할 수 있었다.

  네 번째 남자, 대합실에서 가장 볼 품 없고 작가라고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더 절절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동시에 사랑했던 여자의 이야기는 비극적이다. 앞서 이야기한 두 남자의 이야기나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던 내 첫사랑과 비슷했다면 좋았을 것을. 사랑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이야기는 추억이 많았기에 더 안타까웠다.

그 흐린 아침, 그 흐린 오후, 그 비. 그날 밤. 그리고 당신! 모나리자.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저 말고 누가 있습니까! (171쪽)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자기 말고 누가 있냐는 그 외침이 절절했다.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그녀였는데 그렇게 세상을 떠나버리고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울부짖음이 내 마음에도 울림을 주었다. 영원히 기억하겠노라고 수없이 말한 사람들을 나는 과연 기억하는가?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 내가 떠나온 사람들, 그 과정에서 수없이 상처 입힌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이런 무관심이 갑자기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 호흡에 읽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네 남자가 밤을 새울 요량으로 쏟아낸 이야기인 만큼 깊은 밤에 읽어서 더 가까이 다가왔던 이야기였다. 인도 특유의 문화와 얽혀 들어가는 이야기에 빠져 할 수만 있다면 저자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처량한 기분에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 배경, 누구나 한명쯤 간직하고 있을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빤하게 들릴지 모르나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되돌아봄이었다. 그런 저자의 글에 매료된 것은 뭔가 명확하진 않지만 아련한 시절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명확함이 꼭 현재로 뛰쳐나올 필요는 없으므로 어렴풋한 아련함만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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