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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밖에서 머무르는 시간보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다보니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이사 올 때 도배를 하고 들어와서 그나마 벽은 좀 깨끗하지만 구석구석 이전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때면 나만의 집은 언제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보다 현재 이 집에 살 수 있다는 것, 이 공간을 우리 가족의 울타리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려고 한다. 그러다 종종 정말 안락하고 편안한 집, 이미 지어진 집에 내가 맞춰 사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해 맞춰주는 그런 집을 가질 순 없을까하는 상상을 한다. 아마 그런 집에 내 흔적, 우리 가족의 흔적을 처음으로 남기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 마음에 든 집으로 이사한 주인공 파스칼린은 나와는 상반된 사람이었다. 일단 내가 꿈꾸는 집은 나 혼자만의 집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인데 파스칼린은 가정을 해체하고 다시 혼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엔 아이를 잃은 아픔이 서려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집이란 공간이 보듬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사 온 첫 날부터 맘에 들었던 집에서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그녀가 이사 오기 전에 그 집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걸 보면 좋지 않은 일이란 걸 예감할 수 있었는데 그런 예감을 뛰어넘듯 살해당한 여성이 살던 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연쇄살인범의 희생양이 된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면 당장 떠나야 마땅한데 그녀는 희생당했던 여성의 흔적을 모두 좇는다.
아이를 잃은 슬픔이 있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흔적을 좇는다는 건 어쩜 자신에 대한 치유의 과정일지도 몰랐다. 흔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는 그 과정을 통해 공간이란 곳이 간직하면서 드러내고 있는 많은 것들을 함께 들여다보게 된다. 아픈 기억도 떠오르고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던 기억들도 떠오르지만 희생된 사람들의 뒤를 좇는 일이라 그렇게 행복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나의 바람은 그런 과정을 통해 어렵게나마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꾸리며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길 바랐다. 너무 뻔한 바람일진 몰라도 그녀가 그런 흔적을 간직한 집에 이사 왔을지언정 행복하길 바랐다. 집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현재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라의 열쇠』를 읽고 이 책을 자연스럽게 읽게 됐다. 지금도 종종 책 내용이 떠오를 정도로 가슴 아팠던『사라의 열쇠』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말이었다. 마지막에 로맨스를 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을 가졌지만 과정이 주는 섬세함에 그럭저럭 묻어두기로 했다.『벽은 속삭인다』가『사라의 열쇠』모태가 되었다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한 감이 있었는데 이 작품 역시 결말이 많이 아쉬웠다. 뚜렷한 결론을 내지 않아 섬뜩함을 느낄 수도 있고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 모두를 느끼면서 이렇게 흘러가버린 이야기에 실망을 해버렸다. 제목처럼 벽의 속삭임을 들었더라면 그 속삭임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인식하고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의 상처는커녕 타인의 행복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춰 버린 것 같아 안타까움이 일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직접 겪어야만 비로소 타인의 감정을 알게 된다고 한다. 나이를 조금씩 먹고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면 그때 어른들이 했던 말이 이런 거라며 뒤늦게 깨달을 때가 있다. 좋은 부분이면 그대로 수긍하고 싶은데 아픈 상처를 공감해야 할 때가 가장 힘들다. 살면서 좋은 일만 일어나진 않겠지만 이왕이면 내가 겪은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을 내 스스로가 치유하길 바랄 뿐이다. 도움을 받는 건 좋지만 그 상처를 분출해서 타인을 힘들게 하는 일. 그건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가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