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박물관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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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고통은 언어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 화염 같은 속내를 고작 말로써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통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적든 크든 누구나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관심하게 됩니다.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 27쪽

 

  내 삶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아직 오지 않은 고통에 대해 두려움에 떨게 되는 날들이 많아진다. 소중한 것이 생길수록 그런 걱정이 더 잦아지는데 그래서인지 아무 일없이 지나가는 일상이 지속되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스스로 만들고 해소하는 과정일수도 있으나 닥치지도 않은 고통에서 나를 강하게 단련하려 한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마무리 짓곤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문장을 봤을 때 뭔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누구나 가슴에 말 못할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겠지만 과연 그것을 쉽게 언어화 시켜 타인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픔을 토로하기만 해도 치유가 된다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그런 말을 할 기회와 용기가 함께 내재되어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난 뒤에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큰 고통을 격고나면 타인이 나와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이해하려 하고 위로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자기 박물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통을 감히 이해했노라고 말은 못하겠다. 이해하려는 단계에도 나아가지 못한 데는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고통을 오히려 덤덤히 드러내고 있는 차분함이었다. 고통을 중심에 놓고 구구절절 늘어놓았다면 오히려 진부했을 터인데 추억 속에 갇힌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남 이야기 하듯 툭 던져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소설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는 나와 밀접한 것도 있지만 동떨어지거나 상상 속에 존재할 것 같은 이야기들도 많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나와 밀접한, 그렇기에 더 애잔하고 절절한 이야기들이었다.

 

  마치 기이한 사연이 있다면서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이야기 같았다. 주변에서 일어날법한 일들이지만 누군가의 추억 속에 묻혀 있는 이야기들. 해설에서는 “윤대녕의 주인공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일상의 활력’이나 ‘구원의 여신’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한 장면의 오롯한 ‘재생’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주인공들이 추억하는 장면과 비슷한 혹은 상관없는 나의 추억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나버린 여인의 모습에서 헤어진 연인을 밤새도록 기다렸던 일,「반달」노래를 부를 때는 별자리 찾겠다고 고개가 꺾이도록 밤하늘을 쳐다봤던 일들 같은 나의 추억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행복하지 않았다. 누구하나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과거의 ‘나’의 모습을 뚝 떼어다 보여주며 비탄에 빠져있는 현재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들이 우울하지 않게 다가온 것은 저자의 절제력 때문이었다. 멈출 때 멈춰서고 철저히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 때론 냉정하고 무관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절제 속에 유유히 흘려가는 문체에 빠져들고 말았다. 밝고 명랑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독자를 우울함으로 빠뜨리지 않는 능력. 온갖 고통을 안은 주인공들을 보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을 수 있어서 그 부분이 무엇보다 좋았다. 삶의 애환도 애환이지만 글 속에 녹아있는 유려하고 아련한 문장들이 상처어린 추억이 더 이상 덧나지 않게 해주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글을 읽은 것 같다. 해외소설을 좋아해 번역체에 길들여져 있다 이렇게 우리 문장으로 된 마음에 드는 글을 만나면 마치 개안한듯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이다. 윤대녕 작가의 글은 처음인데 이렇게 첫 작품부터 좋아하게 되었으니 그간 만나지 못했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그 작품들 속에서는 또 어떤 인물을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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