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 이주은의 벨 에포크 산책
이주은 지음 / 이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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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매일 책을 읽지만 과연 그 책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읽고 난 후 나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도, 무언가를 정리하고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을 볼 때면 과연 저 책 속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내용이 가물가물 하기도 하고 아무리 기록해 남긴들 다시 읽지 않으면 내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소설 덕분이었다. 소설과 그림이 얽혀 들어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읽은 소설임에도 생경하게 들리고 내가 이미 본 그림인데도 다르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낀다거나 자괴감을 갖는 다는 의미는 아니다. 같은 소설이 다르게 다가옴을 느끼고 나의 감정과는 달리 새롭게 얽히는 이야기들이 참 재미있었다. 한 폭의 그림과 한편의 소설이나 영화 혹은 화가의 삶이 모두 뒤섞이는 글임에도 어지럽지 않았다. 오히려 질서정연하게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을 음미하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그림은 몇 초밖에 보지 않을 때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본 그림이 허투로 다가오진 않았다. 이야기에 얽힌 그림은 더 진중하게 다가왔고 그 이면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다양하게 상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진실에 근거하고 없고 보다 비슷한 그림과 소설을 보면서 연결시키고 마음껏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신선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을 연결시키고 끝이 났다면 이 책을 이토록 즐겁게 읽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의 소소한 사색과 경험이 들어가 있고 그림과 연관이 되건 아니건 독자들에게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도 좋았다. 그 메시지가 억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고 생각할 수 있어 한참을 멍하니 책장을 붙들고 있기도 했다.

 

당장은 시간낭비처럼 여겨지는 사소한 모험들이 하루하루 누적되어 스스로의 운명을 써가는 것이리라.(71쪽)

 

  이런 문장도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내가 경험해 본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냥 책이 좋아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책을 읽던 날들이 있었다. 보상을 받고자 언젠가는 빛을 발하겠지 하며 지낸 날들이 아님에도 그런 날들은 쌓여 나에게 되돌아왔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나는 저 문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내가 아무렇지 않게 한 행동들이 나중에 또 어떤 빛을 발할지 알 수 없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진실을 갈구한다 해도, 기억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행히도 완벽한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62쪽)

 

  이 문장은 어떤가. 요즘 들어 부쩍 나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곤 하는데 그렇게 행복하게 자랐다고 할 수 없는 그 시절을 무작정 그리워하는 것에 대해 분명 어떤 모순을 느꼈다. 그러다 이 문장 앞에서 해답을 얻은 듯 조금 후련해졌다. 불완전한 내 기억이 좋은 것만 기억나게 하고 아련함으로 포장시켜 그 시절을 현재보다 낫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불완전한 기억에 기대는 것을 그만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불완전함에 기대 더 맘껏 상상하고 포장하게 되었다. 나만의 기억이니 내 안에서는 그럴만한 자유가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수많은 그림을 보았고 다양한 소설과 영화,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보면서 예술의 몸을 빌려 드러낸 인간의 불안함, 고독, 기쁨, 불확실성을 보았다. '유럽의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세기말, 세기 전환기, 또는 좋은 시절이라는 뜻의 벨 에포크로 불'렸다고 한다. 이 책 속에 드러난 수많은 이야기가 마냥 '좋은 시절'의 이야기라곤 할 수 없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긍정과 부정적인 면모를 속속들이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세기말이라고 해서 불안할 것도 없고 세기 전환기라고 해서 찬란한 것도 없었다. 좋은 시절은 내가 만들어 낸 일상 속에 묻혀 있음을 이 책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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