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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마커스,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뭔지 아나?”
“아뇨.”
“그 사람을 잃는 것이네.”(1권 293쪽)
그 사람을 잃지 않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늠’할 수 있으며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회와 번민도 없고 다른 운명을 생각해 보지 않은 평안함이 함께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순간, 사랑 때문에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워지고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처럼『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사랑 때문에 남게 된 후회와 번민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날, 놀라가 해리 쿼버트를 만나러 가는 그 순간, 조금만 만남이 빗나갔어도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처음이 아닌 끝에서 바라보자면 무척 안타깝고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1975년 8월 30일 그날 하루의 사건만 놓고 봤을 때 평면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나열했다면 독자는 쉽게 싫증내고 주변에 일어나는 이야기로 치부하며 그 안에 사랑이 과연 존재했는지 의문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평면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고 치밀하게 구성해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데 성공했다. 9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쉼 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저자의 이러한 능력이 충분히 발휘됐음이다.
소설은 열다섯 살 소녀 놀라가 실종되고 그로부터 33년 후 그녀의 유해가 해리 쿼버트 정원에서 발견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왜 놀라는 피투성이로 숲속에서 쫓겨야 했으며 하필 해리 쿼버트와 떠나기로 한 날 실종되어 버린 것일까? 그리고 왜 해리 쿼버트 정원에 묻혀 있었던 것일까?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해리 쿼버트는 놀라의 유해와 함께 발견된 자신의 원고 때문에 살해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마커스는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녹록치 않음은 900페이지라는 분량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33년 전의 일을 들춰내는 것부터,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일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쉽지 않았다. 모두가 해리 쿼버트를 죄인으로 몰고 있을 때 마커스만이 그의 말을 믿어주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의 진실로 향했다. 진지하게 임하기도 하고 유머와 능청스러움이 소설 곳곳에 묻어나 결말을 향해 감질맛 나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나의 입에서는 허무하다는 고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마커스. 책의 마지막 내용만으로 좋은 책의 여부가 결정되는 건 아니네. 이전의 내용들과 어우러져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지. 책을 읽고 난 독자는, 그러니까 책의 마지막 단어를 읽고 난 바로 그 순간 아주 강렬한 느낌에 젖게 되네. 지금까지 읽은 책의 내용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상태로 한동안 책표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게 되지. 그 미소 한구석에는 슬픔이 어려 있을 걸세. 이제 책 속의 인물들이 그리울 테니 말이야. 마커스, 좋은 책이란 다 읽은 게 아쉬워지는 그런 책이라네.” (2권 409쪽)
좋은 책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은 독자 스스로의 몫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강렬한 느낌에 젖었던 건 사실이다. 놀라의 죽음 뒤에 감추어진 그날의 사건의 진실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란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사건의 얽힘 속에는 인물들의 흐름이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놀라가 목사인 아빠와 함께 먼 곳으로부터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해리 쿼버트의 명작『악의 기원』의 숨겨진 저자, 놀라가 살해 된 진짜 이유들의 개연성이 조금 아쉬웠다. 이 사건의 중심인 해리 쿼버트와 놀라의 사랑이 어긋나고 틀어져버린 그들의 인연이 결말로 인해 단정되지 않길 바랐다.
마음이 짐이라는 게 있다. 어떤 일을 후회하거나 선택을 바꿀 수 있다면 좋았을 거란 탄식. 그것을 되돌릴 수 없을 때 마음의 짐은 더 무거워진다. 이 작품 속의 여러 인물들에게 마음의 짐이 있었다. 33년 전 죽은 놀라로 인해 생긴 마음의 짐이 그대로 묻혀 버렸다면 오히려 더 나았을까? 진실이 드러났을 땐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웠지만 분명 마음의 짐은 덜어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꼭 밝혀지는 법이고 무언가를 숨기며 살아가기엔 인간은 참 연약하다. 그 연약함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이 작품을 통해 낱낱이 확인했으므로 이런 범죄와 후회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거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을 지키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