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이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책장에서 이 책을 묵혀뒀을 지도 모른다. 오래 전 지인에게 『파이 이야기』 일반판과 일러스트 판을 동시에 선물 받았으면서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야 부랴부랴 일러스트 판으로 읽다 영화를 보고 마저 읽어버렸다. 평상시의 나라면 책을 읽기 전에 절대 영화를 먼저 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 바뀐 순서가 오히려 이 책을 더 풍부하게 만나게 해준 기분이다.

 

  일러스트도 만나고 영화도 만났기 때문에 활자로 읽는 주인공의 모습과 묘사해내는 풍경이 그대로 각인되었을 거란 걱정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만났기 때문인지 광활한 태평양의 단조로움이 아닌 보이지 않은 이면까지 샅샅이 만끽한 기분이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가족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머무르게 된 보트 안에는 온갖 동물들, 특히 벵골 호랑이와 함께 탄 소년 파이의 운명은 가혹했다. 다른 동물들이 사라지고 벵골 호랑이와 남게 된 상황에서 구조의 손길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곧 죽음을 맞이할 거란 두려움과 절망감만이 가득했다. 

 

  긴 사연을 가진 파이의 이름만큼이나 사람 이름을 갖게 된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 호랑이와 한 보트 안에 그것도 구조의 손길이 불투명한 망망대해 앞에 마주할 운명이 얼마나 될까? 극히 드문 상황인 만큼 이 이야기는 특별하다. 그리고 슬픔과 감동이 가득하다. 무려 227일이나 함께 한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삶과 죽음 그 이상을 맛보았다. 구조될 거란 희망보다 죽음의 위협(굶어 죽든, 호랑이에게 잡혀 죽든)이 더 강한 상황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던 과정은 그야말로 처절하다. 바다 위에서의 하루하루가 처절할 정도로 낱낱이 그려졌다. 바다라는 또 다른 죽음의 위협 앞에 노출 된 파이는 급기야 리처드 파커에게 사랑 고백까지 하게 된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324쪽)

 

  늘 파이를 위협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든 리처드 파커였지만 극한의 상황 속에서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파이가 호랑이에게 고백을 하다니. 뼛속까지 스며드는 좌절과 공포와 외로움 앞에 리처드 파커의 존재만으로도 버텨낼 수 있는 용기를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는 것이다. 나라면 진작 포기해 버렸을 삶을, 파이는 그렇게 벵골 호랑이리처드 파커와 함께 견뎌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리처드 파커 뿐이었기에 그 과정이 더 처절했고 간절했으며 마음 아팠다. 책을 펼칠 때마다 펼쳐지는 파이의 고통이 현실의 나와 괴리를 만들었지만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 까란 생각에 파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과연 이 표류가 끝날까란 의문이 가득한 가운데도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이별은 찾아왔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육지에 도달했을 때 리처드 파커는 숲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런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린 리처드 파커의 뒷모습을 보면서 파이는 절규하는데 그간의 긴장과 고통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리처드 파커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이별이 예정되어 있음을 감지했으면서도 그들의 이별 앞에 나 역시 팽팽하게 당겨지던 긴장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것은 안도이기도 했으며 허무이기도 했다. 또한 너무 어린 나이에 삶의 경지를 맛본 소년 파이와 함께 한 과정의 마무리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이처럼 남들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일을 경험하고, 가족과 모든 것을 잃은 채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아 리처드 파커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망망대해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삶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어쩌면 리처드 파커 같은 존재가 있을 지도 모른다. 나를 위협하지만 그랬기에 존재만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된 존재. 사람일 수도, 꿈일 수도, 욕망일 수도 있지만 그런 존재에 자극을 받기 보다는 순응하고 따라가며 감사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이처럼 경험해서 파이 같은 삶을 살 수 없듯이 타인을 통해 현재의 나를 돌아보며 앞으로 향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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