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여름방학 때면 공부를 한답시고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배게며 간식이며 라디오며 살림을 따로 차릴 정도로 늘여놓고 널브러져 있는 게 일과였다. 공부는 늘 뒷전이고 잠자고 책 읽기 바빴지만 그때 바라본 풍경들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나는 어렸었고 하늘을 보며 무한한 꿈을 꾸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걱정도 앞섰지만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공상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가늠되지 않아 늘 두려웠던 것 같다. 그 두려움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무언가를 잃고 나니 내 마음은 피폐해져 버렸다. 그래서 이렇게 달달한 제목의 소설을 꺼내들었는지도 모른다.
읽고 있는 책이 많았지만 뭔가 내 마음을 다스려 줄 책이 필요했다. 나와 비슷한 상황, 아니면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었다.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보여주는 놀라운 소설!' 이 문구에 끌린 이유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은 위로를 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었고 이 소설을 만났다. 그리고 빠져들었다. 동거하던 남자친구가 집을 나가 친한 친구와 사귀고, 자살한 아버지, 사이가 좋지 않은 어머니 사이에서 리에는 도피했다. 산골에 자리한 꿀벌의 집에 찾아가 면접을 보고 거처를 옮겨오기까지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다. 벌을 키우고 꿀을 채취하는 일은 도쿄에서만 살아온 22살 리에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된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도피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자연은 늘 배신하지 않는 것 같다. 살아 쉼 쉬는 자연 속에 있다 보면 인간도 미물이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어느 곳에 있던지 그 사실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지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리에는 양봉 일을 하면서 그 과정을 충실히 경험했다. 리에 뿐만 아니라 상처 받은 사람들과 그곳에 붙박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평화로운 곳을 보며 도시의 치열함과 냉정함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잔잔하면서도 소소하게 써 내려간 그곳의 풍경과 일상들이 나에게도 평안을 주었다.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빤히 보인 구성에는 조금 아쉬웠지만 리에가 변화되는 모습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어 과정만으로도 많은 위안을 받았다.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도쿄에서 살아온 22살의 리에가 그런 삶을 살수도 있겠다는 들여다봄이 아니라 나에게도 다양한 삶이 펼쳐져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리에처럼 그런 산골에 찾아가 자연과 마주할 수 없지만 리에를 통해 마치 내가 그곳에서 생활한 듯한 간접경험을 했다. 독서의 효과를 제대로 충족한 셈인데 책으로 치유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 과정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작품이었다.
사람의 일생이란 말이지, 땅속에서 솟아나온 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마침내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 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