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온갖 상념을 실어 보내고, 또다시 생겨나는 파도에 다른 생각을 물고 오는 일. 바다를 볼 때마다 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바다를 보는 일은 지겹지 않다. 언젠가부터 파도 결이 모두 다름을 깨달았다. 그 결처럼 나의 생각도 수천 가지가 떠올랐다 사라지곤 한다. 하나의 고민을 건져 올리고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수많은 파도의 결을 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도 늘 내포되어 있다.

 

바다를 보며 잠이 들었다. 달콤한 꿈을 꿀 거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풍경, 고요한 시간. 오랫동안 바랐던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나는 중요한 사람에게 신뢰를 잃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시 신뢰를 얻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밖에 인지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깼다. 눈앞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읽다만 책 한 귀퉁이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마치 수술을 해서 잘라낸 것처럼 공포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이 들어섰다.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것이. 그것이 그들을 남자로 만들어주었다. 여자들도 그것을 알았다. 빌어먹을 공포가 그들에게서 사라졌다는 것을.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중

 

꿈에서 깬 나는 한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꾼 꿈. 내가 보고 있는 바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문장 앞에서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소설속의 프랜시스 머콤보가 부러웠다. 사파리에 나섰다가 공포를 만나고, '빌어먹을 공포가' 사라진 경험을 한 그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목도할지 궁금해졌다. <킬리만자로의 눈> 에서는 죽음을 앞둔 남자 해리를 만났다. '잘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게 되면 쓰려고 아껴두었던 것들을 영영 쓰지' 못할 것을 알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

 

결국에는 싸움의 부식력 때문에 그들이 공유했던 것들이 죽고 말았다. 늘 그랬다. 그는 너무 많이 사랑했고, 너무 많이 요구했고, 결국 모두 닳아 없어지게 만들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중

 

자신의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담담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사람도 있다. 프랜시스 머콤보는 공포가 사라진 멋진 삶을 앞두고 생을 마감했고, 해리는 감염된 상처 때문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아껴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다. 두려워하다 자신이 가는 곳이 '킬리만자로의 평평한 꼭대기' 라는 걸 알고 죽음을 뛰어넘어 버린 사람과 잠시 후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삶은 그렇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뿐인 걸까? 그러나 그들이 불행한 삶을 살아왔다거나 단정 지을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진중하게 만났다고 믿고 있다.

 

여행의 묘미는 다양한 경험이다. 이곳에서 책을 읽는 것, 바다를 보며 낮잠을 자는 것도 평범하지만 여행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 반면 처음 경험해 보는 일들도 많았다. 스노클링, 바다낚시, 스킨스쿠버다이빙 등 앞으로 내 기억을 풍부하게 해 줄 추억들을 쌓았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삶의 경험을 녹인 '닉'이란 인물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치부하기엔 파란만장한 삶. 헤밍웨이 작가의 '인생관과 미학적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했듯이 여러 가지 의미를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여행을 통해 만난 다양한 내 모습처럼 말이다.

 

한 인물이라고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웨이터로 나오기도 하고, 아버지와 함께 인디언 임신부의 출산을 돕고, 친구들과 스키를 즐기고, 전쟁터 속의 군인, 이별을 겪고, 송어 낚시를 하는 모습 등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겹치고 세월의 흐름에 변해가는 모습을 발견하곤 뒤늦게 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저자 자신의 삶이 녹아있다는 사실과 하나의 장편으로 볼 수 있는 구성, 뛰어난 단편작가의 면모를 느끼고 후에 명작을 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도. 특히 <심장이 둘인 큰 강> 1, 2부를 읽으면서 <노인과 바다>의 밑그림을 본 듯 했다. 헤밍웨이 작가의 장편소설의 명성만 들어왔던 내게 이 작품집은 늘 익숙했던 길의 뒤편으로 들어갔다 비밀의 화원을 발견한 것처럼 지난한 일상을 통과해버린 기분이다. 아니면 비밀의 화원을 나 혼자 뒤늦게 발견한 셈이거나.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거나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상처를 치유 받기도 한다. 물론 즐거움 때문에 소설을 읽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스스로 치유하고 힘을 얻는 과정 때문에 소설을 가까이 하는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여행에서 이 작품집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바다를 보지 않았더라면, 다른 꿈을 꾸었다면, 내가 만난 글귀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게 끝났어." 닉이 말했다. "왜 그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 어쩔 수 없었어. 꼭 지금 이렇게 사흘간 바람이 불어 나무에서 잎을 모두 벗겨내는 것과 똑같아." <사흘간의 바람> 중

 

내안에도 이런 절망감이 있었다.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 그냥 방에서 기다리기만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 빌어먹을. 너무 끔찍해." <살인자들> 중

 

나도 이렇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 작품집을 읽게 됐고 내 안의 두려움과 절망감이 조금씩 사라짐을 느꼈다. 왜 이렇게 깊은 공감과 함께 용기를 얻은 것일까? 비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만을 모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려한 문장, 함축인 의미와 때론 세세한 묘사가 주는 다양한 매력도 물론 큰 이유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진실성과 고비마다 묶여있는 고민의 드러냄만으로도 동질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앞으로도 바다를 보면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상념을 떠나보내고 또 다른 생각들을 이끌고 올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곳의 바다에서 만났던 절망과 두려움, 헤밍웨이 작가의 작품집을 통해 얻었던 용기와 위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는데, 매일 우리는 그것을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 <하얀 코끼리 같은 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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