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연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내려가는 고향집. 기차를 타고 가면서 읽을 책들을 신중하게 골라왔다. 왕복 10시간 정도를 계산하고 책을 여러 권 들고 왔는데 실컷 책을 읽겠다는 포부는 사라진 채 목이 아프도록 잠만 잤다. 머리가 띵해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꺼낸 책은 의외로 달게 읽혔다. 배고픔도, 너무 뜨거운 히터 바람도, 눈치 없는 아이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읽기에 무척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책 속의 예쁜 찻잔을 보자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 몸부림이 쳐졌지만 내 코끝에 진한 커피향이 남아 있는 듯 해 괜히 내 주변을 킁킁거렸다.

 

  『잔』이란 책은 나에게 굉장히 신선했다. 시럽이 잔뜩 들어간 커피만 먹는 극적인 나의 취향을 비웃듯이 예쁜 찻잔의 향연은 눈을 현혹시켰다. 잔이라곤 여기저기서 받은 머그컵이 전부라 특별히 찻잔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찻잔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특히 받침대까지 있는 찻잔은 뭔가 나에게 오글거리는 느낌이었다. 커피는 잠을 쫓거나 배고픔을 달래거나 깊은 밤의 정적과 고요함을 이기지 못해 마시는 음료로 전부였다. 커피의 텁텁한 맛이 싫을 때면 종종 다기를 꺼내 잎 녹차를 우려 마시는 정도다. 그래서 예쁜 잔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다거나 나름대로의 찻잔을 고를 취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책에서 다양한 찻잔의 향연만 논했다면 읽는 데에 치중하다 덮어버렸을 것이다. 글보다 찻잔의 일러스트와 사진이 더 많은 책을 보면서 '잔'에는 참 다양한 생각이 담겨있다는, 혹은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잔'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함께 했던 추억,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다양할지 몰라도 평범하지만 자잘한 이야깃거리가 많은 일상처럼 수많은 잔속에 그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잔에 대한 애정, 잔에 얽힌 이야기, 특별하고 평범한 잔들의 이야기들이 소소하게 잘 얽혀 있었다. '잔'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카페 '제리코'가 있었다.

 

  '자신을 '백마담'이라고 불러 달라는 여사장의 도도한 매력과 짙고 신 그 커피맛에 반해' 거의 매일 살다시피 한 카페 제리코. 그곳에서 다양한 잔들만큼이나 다양하고 독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감 있게 흘러나왔다. 카페 이름과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고 저자가 잠시 머물렀던 외국 카페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커피맛과 사람들에 반해 드나들게 된 그곳은 내 주변에 그런 카페가 없다는 것이 질투 날 정도로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곳을 드나든 사람들이 독특한 분위기의 카페를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 사이의 애정이 더 돋보였다. 잔과 커피의 향연만이 아닌 인간미가 묻어나는 그곳.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드나들지만 좀 멀리 사는 친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곳. 결국 그 카페가 사라져 버린 것이 너무너무 아쉬웠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 카페 제리코는 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잔에 대한 애정이 생겨났다. 알지 못해서건 관심이 없어서건 잘 알지 못하던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이 또 있을까. 일례로 예쁜 잔을 봐도 그냥 눈대중으로 보고 지나치던 잔들을 굉장히 애정 어린 눈으로 살피다 조심히 바닥을 뒤집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컵 바닥의 스탬프를 통해 컵의 브랜드 생산연도, 제품 생산 번호 등을 알 수 있다는데 자세히 모르면서도 아는 척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것이 무엇이건 잠시나마 삶을 벗어던질 수 있다면 일탈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보다 큰 위로가 있을까.'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본 듯 소소하지만 진솔한 이야기가 펼쳐졌던 이 책을 통해 잠시 일탈을 한 기분이 든다. 그 일탈은 위험한 짜릿함이 아니라 현재를 더 잘 살아가기 위한 쉼으로 느껴졌다.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애정을 드러내고 타인에게도 권할 수 있다는 것. 진정성을 담아 전달할 때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에게도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예쁜 잔을 하나 사고 싶다는 열망이 인다. 평소의 나라면 상상할 수 없는 꽃무늬가 잔뜩 있는 호리호리한 잔이면 더 좋겠다. 새로 생긴 이야기를 그 잔에 담다보면 나에게도 다양한 잔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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