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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우연히 알게 된 외국인 친구에게 메신저로 더듬더듬 말을 건넨다. 월요병이 있어 주말이 좋다고. 이 말에는 외국인이라도 공감하는가보다. '하하' 웃어주는 친구를 뒤로하고, 정말 가끔은 그냥 내 맘대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 앞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바틀비씨는 정말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요즘 말로 '용자'라고 하는데, 그를 온전히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다.
허먼 멜빌의 유명한 단편에다 보르헤스가 적극 추천을 한 사실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책을 덮었을 때 밀려오던 감정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기이한 이야기지만 쓸쓸하고 고독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틀비씨가 못 견디게 안타까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올 정도였다. 분명 내가 바틀비씨의 이야기를 전해줄 화자인 변호사라고 해도 바틀비씨가 용납이 안 됐을 것 같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짜증도 나고 화가 나다 그가 쓸쓸하게 감옥에서 죽어갔다는 것에 한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바틀비씨를 온전히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물음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화자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혹은 일했던 필경사들 중에서 바틀비 만이 전기를 쓸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했다. '내 두 눈으로 본 것, 그것만이 내가 그에 관해 아는 전부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틀비는 독특함을 넘어 삶을 통틀어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축에 들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독보적인 강렬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오전 오후로 번갈아가며 일을 산만하게 처리하는 직원보다 성실하고 묵묵하게 일하는 바틀비씨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는 단 사흘 만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잘한 심부름도, 일에 관한 것도 모두 안하겠다니. 화자도 처음엔 바틀비씨를 이러 저리 신경 써 주었지만 점점 모든 것을 거부만 하는 바틀비씨를 참아줄 인내는 금방 바닥나고 말았다.
결국 바틀비씨를 두고 이사를 가야 할 지경으로 그의 태도는 심각해졌다. 필사까지 거부하자 해고를 했음에도 한 발짝도 떠나지 않는 바틀비씨를 어느 누가 용납하고 이해하겠는가. 이상하다 못해 무서워지기까지 한 바틀비씨를 피해 이사를 했을 때는 그쯤에서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건물에서도 절대 움직이지 않는 '불가해한 타자' 일 뿐인 바틀비씨로 인해 한바탕 사건이 터지고 만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알고 싶었으나 그는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어떠한 말로도 자신을 옹호하지 않음은 물론 피해만 주는 '불가해한 타자'란 인식만 깊이 심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를 몰아붙이면 잘못을 뉘우치거나 정신을 차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예상을 깨고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음식도 거부한 채 어떠한 말도 없이 그렇게 쓸쓸하게 죽어갔다. 화자는 그가 죽은 뒤 몇 달이지나 진실인지 아닌지 들리는 소문을 얘기하며 의미심장하게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바틀비와 인류를 동시에 놓고 한탄할 정도로 그의 죽음과 삶은 베일에 싸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바틀비씨 같은 사람을 철저히 외면한 적이 있다고, '안 하는 편을 선택'하고 싶어도 당연한 듯이 하는 편을 선택하며 살았다고, 현재도 바틀비씨 같은 안타까운 삶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나를 향해 외쳐대는 것 같다.
그래서 바틀비씨의 죽음이, 잘 알지 못하는 그의 삶이 쓸쓸하다 못해 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분명 감당할 수 없음에도 단칼에 잘라버릴 수도 없다는 사실이 착잡하게 다가온다. '필경사 바틀비'의 삶은 그냥 잊어버릴 수도 없는, 지나칠 수도 없는 무언가 걸림돌이 되는 이야기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걸림돌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느꼈던 불편함으로 연결해 보면 될 것이다. 그런 불편한 감정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바틀비씨가 아닌 자신을 만나더라도 놀라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