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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스!
햐쿠타 나오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는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깊은 흡인력과 감동을 만나는 독서다. 시간에 개의치 않고, 내일의 피곤함을 걱정하지 않은 채 나를 끌어당기는 책들을 만날 때의 흥분과 뿌듯함. 고요한 새벽에 스탠드 불빛에 기대 책을 보다, 고개를 들어 빈 벽을 바라보아도 허전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 내가 가진 시간 중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세상의 어떤 것도 이런 만족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아주 오랜만에 그런 시간을 갖게 된 주인공은 '2009 일본 서점대상 Best 5'에 들었던 『복스!』란 책이었다. 책이 너무 두툼해서 절대 오늘 다 못 읽을 거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건만, 밤이 깊도록 책을 덮을 수 없었다. 책이 마치 나를 읽는 듯 꼼짝 않고 책과 혼연일체 되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책의 환영들이 내 머릿속을 돌아다녔고, 어딘가에서 이렇게 땀을 흘리며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아이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요즘은 권투라는 운동이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한참 인기가 있을 때도 서로 치고받는 모습 때문에 절대 즐겨볼 수 없는 스포츠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권투라는 운동이 굉장히 위험하고, 대단한 끈기와 인내, 노력이 있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 과학적인 운동이라는 것, 싸움을 잘하기 위해 배우는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권투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지, 또한 그들에게 근본 없는 연민의 시선을 던졌다는 사실이 무척 부끄러웠다. 특히나 이 책의 주인공인 기타루와 가부라야를 보면서 내가 무언가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매달린 적이 있었던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 이 아이들로 하여금 권투에 온 힘을 쏟게 만들고, 고독하고 힘든 세계라는 것을 앎에도 끌어당겼던 것일까?
가부라야는 프로체육관에 라면 배달을 왔다가 권투를 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들을 정도로 천재적인 면을 보인 아이였다. 게다가 체육관에 다닌 지 보름도 안 된 가부라야가 스파링을 한 상대는 2년이나 배운 선수였는데, 다음 날 체육관을 관둘 정도로 가부라야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타고 나서인지 가부라야는 프로로 전향하지도 않았고,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며 설렁설렁 권투를 했다. 그럼에도 그의 실력은 뛰어났으니 과연 천재는 타고난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한편 유치원 때부터 친구인 기타루는 모범생이지만 약골에다 두려움 때문에 싸움 같은 것은 해 본적이 없었다. 중학교 내내 왕따를 당해도 맞서지 못할 정도로 소심한 아이였는데, 어떤 계기로 가부라야와 함께 권투를 배우게 된다. 지하철에서 불량배로부터 자신이 짝사랑하는 선생님을 구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 가부라야가 그런 아이들을 멋지게 쓰러뜨려준 것에 대한 동경은 기타루가 권투에 온전히 마음을 쏟기엔 조금은 부족했다. 하지만 같은 반 여학생 앞에서 중학교 때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에게 굴욕을 당하자 기타루는 권투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기타루는 가부라야와 함께 권투를 하면서도 늘 그를 동경했다. 자신은 권투에 대한 재능이 없었기에 그야말로 우직하게 조금씩 배워나간다. 왼손 잽을 알려주면 집에서 수천 번씩 오로지 그 동작만 연습했고, 오른손 잽을 알려줘도 마찬가지였다. 장학금을 받는 우등생이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오히려 운동 때문에 좋아진 체력으로 공부도 놓지 않으며 '문무겸비'라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된다. 권투를 하게 되면서부터 가부라야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자신은 아무런 재능이 없다는 사실에 한탄을 하기도 한다. 굴욕감 때문에 권투를 배우게 되었지만 기타루의 목표는 경기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닌 강해지기 위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라는 것을 인지하고 온 열정을 다해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간다.
그런 가부라야와 기타루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부라야에게 도움을 받고 얼떨결에 권투부 고문이 된 요코 선생님, 가드만 올리라고 할 뿐 열성적으로 지도를 하지 않지만 믿음을 주는 사와키 감독님, 가부라야를 좋아해 권투부 매니저가 된 마루노. 그 외에도 각자의 개성을 지닌 권투부원들이 있었다. 처음에 이들이 함께 했을 때는 가부라야의 천재적인 재능 이외에 특이할만한 일들이 없었는데, 기타루가 권투를 배우고 많은 일들이 일어나면서 한층 더 끈끈해지고 인간미가 넘치게 된다. 그렇더라도 권투에 대해 무지한 내가 이 소설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저자의 입체감 있는 묘사덕분이었다. 가부라야와 기타루가 링 위에서 시합을 할 때마다 마치 내가 그 링 위에서 선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장면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상대 선수의 숨소리와 땀방울이 느껴질 정도로 시각적인 묘사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거기다 얼떨결에 권투부 고문을 맡게 된 요코 선생님을 통해 독자에게 알려주듯, 권투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와키 감독님과 가부라야의 첫 스승 소가베 영감까지 합세해 일반인이 갖지 못하는 권투에 대한 지식을 그야말로 깊이 있고 다양하게 알려주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650페이지가 넘는 책을 하루만에 다 읽을 정도로 빠져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기타루가 과연 권투를 잘 하게 될 것인가,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가부라야는 후일에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아이들이 권투로 인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가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긴장하게 되었고, 그들의 내면의 소리를 통해 실력이 얼마만큼 향상되고 무엇이 부족한지, 권투가 얼마나 고독한 운동인지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우직할 정도로 권투를 배워나가던 기타루는 점점 실력을 드러냈고, 권투는 잘하지만 혈기왕성한 가부라야는 늘 겉돌았다. 그럼에도 가부라야는 기타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노력 앞에서 천재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기타루가 보여주었다. 신인대회 우승을 하며 엄청난 성장을 한 기타루는 가부라야와도 링 위에서 만나게 되고, 가부라야보다 한 수 위인 최고의 선수 이나무라와도 만나게 된다. 가부라야 역시 맞설 상대가 없어 보였지만 열심히 하지 않고 덜렁대다 어이없게 질 때도 많았다. 이나무라가 강한 걸 알고도 이길 수 있다 큰 소리 치지만 결국 그에게 지고, 그 앙갚음을 기타루가 해주길 바랐다. 가부라야가 그런 믿음을 가질 정도로 기타루는 성장했고 반면 가부라야도 힘들 정도로 센 상대가 이나무라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를 가장 긴장시켰던 경기는 가부라야와 이나무라의 경기, 가부라야와 기타루 경기, 기타루와 이나무라 경기, 다시 붙게 된 가부라야와 이나무라의 경기였다. 수많은 경기가 나오지만 그 모든 경기들이 최후의 이 경기들을 위해 과정을 밟아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박진감 넘치며 긴장감 있는 경기였다.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단순히 결과로 그들의 실력을 판단하며, 그것으로 그들의 인생을 예측할 수 있을까? '고독한 스포츠다. 연습은 함께 할 수 있지만 싸울 때는 늘 혼자다.'라고 말하는 기타루처럼 철저히 혼자이고 고독한 세계에서 아이들은 그렇게 성장해 간다. 그리고 모든 경기가 끝이 난 후 에필로그를 통해 십년 후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는지를 보여주자 나의 눈가는 뜨뜻해졌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내부에 잠자고 있는 재능'을 발굴 했는지, '진짜 재능은 사실 노력하는 재능이야.'란 말처럼 무언가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을 했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부라야처럼 재능이 없다고 합리화를 시켜버리기엔 엄청난 노력으로 무섭게 성장한 기타루가 있었다. 그 아이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내가 부끄러워지면서도 나의 내면에서 뜨거움이 치밀고 올라오는 것을 감지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나를 점령해 버리는 것이 아닌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이렇게 묵묵히 노력하는 아이들, 어른들도 감당할 수 없는 고독과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그들이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내가 용기를 얻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뛰어넘으려는 그들을 통해 보잘 것 없는 내가 용기를 얻었다. 재능을 발굴하겠다는 의지, 노력하는 재능이 아니라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진정한 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