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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
리바 브레이 지음, 이원경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남녀공학인 중학교를 다니다 여고를 갔을 때, 무언가 밋밋했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자아이들과 거칠게 장난을 치며 놀던 것이 익숙해 그대로 여자아이들에게 장난을 쳤다가 곤욕을 치른 기억도 난다. 중학교는 탁 트인 들판 같은 느낌이었다면 여고는 어떤 공간에 잘 보존되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밋밋함 때문에 학교생활에 금세 활기를 잃어버려서인지 여고생활의 특별한 기억이 없다. 급식도, 기숙사도 없었던 학교라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처음으로 교복을 입어보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분명 학교생활의 답답함,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을 터이나 10년이 지난 현재에서 당시의 느낌을 불러일으키기엔 무리가 있다.
뜬금없이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꺼냈던 것은 『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 때문이었다. 기숙학교의 소녀들을 만나보니 자연스레 나의 고교시절이 떠올랐다. 그러나 스펜스 기숙학교에서 평범한 소녀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주인공 제머 도일이 기숙학교로 보내진 배경부터 평범하지 않아서인지 그곳의 일어난 일들 역시 범상치 않았다. 인도에 살고 있는 제머는 늘 영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무슨 일인지 엄마는 제머를 영국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초대를 받아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엄마가 제머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그에 화가 난 제머가 엄마를 둔 채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제머에게 이상한 환상이 머릿속에 그려지는데, 엄마의 이상한 죽음이었다. 너무 놀라 다시 엄마에게 다가가니 엄마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 제머에게 보이는 환상. 도대체 제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렇게 바라던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제머는 기쁘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늘 약에 절어 살았고, 잘난 체 하는 오빠는 숙녀로서 집안 망신을 시키지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제머를 스펜서 기숙학교에 보낸다. 엄마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에도 가족들은 죽음을 감추려했고, 그런 상황에서 제머가 본 환영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기숙학교도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숙녀 교육을 잘 받아 부유한 사람과 결혼하면 그것이 최고의 삶인 양 가르치는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지도 못했다. 제머를 골탕 먹이려 하고,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를 차별하고 힘을 휘두르는 아이들, 늘 보여주기 위해 가식적인 행동을 일삼은 학교생활에서 제머 또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엄마가 죽던 날 인도에서 마주친 소년을 만나게 되고, 엄마의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든 듯 제머에게 환영을 보지 말라고 경고를 한다. 그리고 제머는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것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제머는 자신에게 보이는 환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면서 자꾸 다른 세계로 들어가려했다. 특히나 친구들에 의해 예배당에 갇혔을 때 손에 쥐게 된 일기장을 보며 그곳의 비밀을 풀려한다. 25년 전 화재로 인해 죽은 소녀들이 일기장의 주인이라는 것과 사고가 난 뒤로 폐쇄당한 이스트윙으로 친구들과 함께 가게 된다. 제머는 자신을 늘 괴롭히던 친구들과 모임을 갖다 특별한 능력을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밤마다 자유를 만끽한다. 당시의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만끽할 수 있는 자유는 제머와 함께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나이 들고 돈 많은 남자에게 결혼을 강요당하지도 않았고, 프랑스어를 억지로 배우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 제머는 엄마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엄마를 통해 듣게 된 그 세계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면서도 궁금증을 자아냈다. 제머가 손에 쥐게 된 일기장의 주인공인 메리와 새러는 과연 누구일까? 그 인물들이 밝혀지면서 반전이 드러나고, 제머를 비롯한 아이들의 선택이 남아있었다.
제머가 본 환상이 아니었다면 기숙학교에 들어간 소녀의 이야기와 그곳에서 펼쳐진 에피소드만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제머가 환상을 보게 되는 것과 기숙학교에 전해오는 전설, 제머와 친구들이 건너가는 다른 세계의 비밀 등 현실적인 면과 고딕적인 요소를 잘 버무려 새로운 재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소녀들의 나이를 생각할 때 한참 자유를 만끽하고 싶고, 당시 사회분위기가 주는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텐데 그런 해소를 제머를 통해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간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각자 선택한 것에 대해 존중해 주면서도 안타까운 마음, 좀 더 나은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 못한 미안함이 겹쳐졌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현실을 극복해가려는 제머를 보면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소설에서 보아온 순해빠진 소녀라기보다 당차고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려는 소녀여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두툼한 책임에도 순식간에 읽어버릴 정도로 소녀들의 이야기, 그들이 모험을 떠나는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에 빠져들었다. 이런 소설을 만나고 나면 현실의 내가 낯설 때가 있는데, 어딘가에 이런 세계가 존재하고 이런 소녀들이 있을 것 같다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게 버거운 문제였을지도 모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고민과 행동에 대한 책임감들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그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아이들이 좀 더 자유로웠으면 하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지켜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것이 어른들에게 남겨진 숙제라는 사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