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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마을버스를 타고 퇴근을 할 때면 전에 살던 곳에서 혹시 내려 버리진 않을까 조마조마해진다. 지금 이사 온 곳이 전에 살던 곳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적응이 되지 않는 탓이다. 내가 살았던 곳은 어떤 풍경일지, 내가 향하는 집은 그대로인지 늘 조바심이 인다. 혹시 낯선 곳이 나타날까봐 나만의 공간을 빼앗겨 버릴까봐 조금 불안하다. 그러나 이런 불안감이 현실이 된 한 남자, 마틴 해리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고 교통사고를 당해 72시간의 코마 후 깨어났다고 한다. 바로 집으로 향한 그는 자신의 집에 또 다른 마틴 해리스가 살고 있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아내가 있는 현실과 맞닥뜨린다. 평범했던 식물학자 마틴 해리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택시 안에 있었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72시간의 코마 후 깨어났다는 것이 의심쩍긴 했지만 그래도 그에겐 모든 기억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으며, 현재 식물학자로써 연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그런 현실을 되돌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마틴 해리스를 고소하기도 하고, 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자신과 같이 연구했던 학자에게 누가 진정한 마틴 해리스인지를 가려내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발버둥 치면 칠수록 자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더 알아갈 뿐이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자신을 증명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는 이런 현실에 개탄할 뿐이었다.
마틴 해리스(아직까지 그렇게 믿고 있는)는 자신을 잃어 버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아는데, 타인에게 자신을 증명해 줄 수가 없었다. 만약 우리가 그런 기로에 놓여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숨어버리거나, 삶을 포기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틴 해리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끝까지 파헤쳐 보기로 했다. 절망감은 들었지만 내면에 깃든 기억과 그 동안의 삶을 이대로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증명해 줄 단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자신을 태우고 가던 택시 기사. 그녀를 찾아가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지만 처음엔 탐탁지 않아 하다 마틴 해리스의 절박함을 보고 돕기로 한다.
단 하나 남은 도움마저 위협해 오는 손길. 그 손길은 무엇일까. 그리고 무슨 이유로 자신을 그렇게 해하려 하는 것일까. 마틴 해리스에게 남아 있는 거라곤 기억이 전부인데.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을 모른다고 주장했던 아내가 며칠만 더 기다리면 이 모든 것이 밝혀질 거라는 의문스러운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아내의 행동으로 더욱 더 혼란스러운 가운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온다. 자신의 집에 살고 있는 마틴 해리스가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려 미국에 있던 자신의 조수가 직접 파리까지 날아와 주기로 한 것이다. 마틴 해리스만큼이나 조수가 그를 증명하고, 그 동안의 일을 파헤쳐 줄 거라 생각하자 흥분이 고조되었다. 책장을 펼칠 때부터 흡인력 있게 다가왔던 소설이 더 속도감을 낸 기분이었다. 지금껏 마틴 해리스를 좇아왔던 과정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일었다.
드디어 조수가 파리에 도착하고, 마틴 해리스는 그를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전말이 밝혀지는데, 마틴 해리스는 물론이고 독자도 상상하지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마틴 해리스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을까? 자신 안에 뚜렷이 자리하고 있는 모든 기억들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을지 잃어버릴지는 이 책을 접할 독자들의 손에 맡기고 싶다.
정말 오랜만에 속도감 있는 소설을 만났다. 이렇게 속도감 있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칫 흥미위주로만 빠져 버릴 수 있는데, 마틴 해리스를 통해 내 자신이 누구인가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내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런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면 지금껏 살아온 내 자신을 지킬 의향이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내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 끊임없이 생각해 왔는데, 나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절망감이 나를 짓누른다. 그럴 때일수록 지금껏 살아온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어떻게 인식시킬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남겨진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