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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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한 발짝 물러서서 나를 지켜볼 때 나는 어디쯤을,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지가 궁금해지곤 한다. 내 자신이 나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갈 때는 모든 것의 중심이 나의 시선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이 세상에 어떠한 점(點)도 남기지 않음에 허무해질 때가 있다. 아무런 존재가 되지 못함을 느낄 때처럼 내 자신이 작아 보일 때가 없다. 하지만 그런 작아짐이 어떠한 영향 때문이라면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자신의 선택이 역사의 흐름 때문에 전혀 다른 효과를 만들어 냈다면, 어느 정도라도 위안을 삼으며 안타까워 할 수 있는 것일까? 『울분』은 나에게 이런 고민들을 던져주었다. 역사의 흐름을 개인이 어떻게 떠안게 되는 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과거를 회상할 때, 그때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을 거란 후회를 하게 된다. 『울분』은 우리가 자주 하는 그런 후회처럼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서 주인공 마커스가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마커스가 그 모든 것을 회상하다 분노를 터트리고, 환희를 맛보는 시점은 독자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중간 중간 복선이 깔려 있었지만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마커스의 회상이 책 제목을 그대로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인생이 무상함, 역사의 소용돌이에 서 있는 인간의 나약함, 선택의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책을 덮고 나서도 무엇으로 이 마음을 달래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마커스가 그때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멋진 인생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온통 지배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아버지의 지나친 간섭 때문이었다. '아이를 가두어둘 수 없으며 아이를 세상에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바람에 겁에 질려 미쳐버'린 아버지는 마커스를 사사건건 보호하려 든다. 늦은 밤에 문을 열어주지 않는가 싶으면, 세상은 위험하다고 늘 조심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쉴 새 없이 해 댄다. 사랑과 걱정이 집착이 된 아버지는 지나치게 아들을 보호하려 들어, 마커스는 집 근처의 학교에서 아주 먼 곳으로 옮긴다. 그곳에서 법률가로써의 꿈을 키워나가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부를 하지만 삶은 마커스에겐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룸메이트 때문에 기숙사 방을 두 번이나 바꾸고 매력적인 올리비아에게 빠지지만 그 모든 것이 위험요소인 듯 하나하나 마커스를 옥죄어 온다. 방을 바꾼 것 때문에 면담을 하게 되고, 자살 경력이 있고 무언가 위험한 매력을 지닌 올리비아는 점점 마커스가 걸어온 길이 아닌 곳으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초다.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고, 이 책에도 전쟁의 어두움이 등장할 정도로 당시의 젊은이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전쟁터에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반대로 평안함을 누리고 있다는 안정감이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올리비아가 성적 호기심을 넘어 적극적으로 다가온 것, 그녀가 자살한 경험이 있고 이혼한 부모를 뒀다는 것은 지금처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갈 때마다 마커스가 불안해 보였는데, 그의 엄마나 친구들도 그렇게 느꼈나 보다. 엄마는 그녀와 헤어질 것을 강요하고, 친구들도 좋은 말을 하지 않는다. 결국 어떠한 사건 이후로 학교에서 모습을 감춰 버린 올리비아를 보며 힘은 들더라도 다시 자신의 길을 갈 거라 생각했던 마커스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운명의 짓궂음과 마주하게 된다. '채플을 견디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었다면' 마커스는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채플을 듣지 않았고, 학장 앞에서 격정적인 말을 뱉어 자신이 피하고자 했던 최후의 곳으로 가게 된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마커스로 인해 처절히 보여준 셈이다. 그가 이 모든 것을 회상하는 시점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마커스의 모습은 언제든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선택과 역사의 흐름 속에 휘말린 개인의 삶을 속속들이 경험했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소설의 배경이 1950년대 초라고 해도, 현재의 우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내용들이 아님에 저자의 위력을 느낀다. 철저히 '필립 로스 식'으로 써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 펼쳐진 저자의 매력이 무엇인가를 온전히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그라지는 이 청춘 앞에 다가온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자꾸 마커스의 선택을 내가 더 후회를 하게 만드는 소설의 반전은 내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그러다가도 이 달랠 길 없는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희미하게 깨닫게 해준다. 최선으로 살아가는 것. 운명의 짓궂은 장난이 밀려오더라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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