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보급판 문고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서관에 관한 에피소드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나는 주로 내 책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읽고 와서인지 특별한 기억은 없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속으로 꿈꾸었던 것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갈망이 있었다. 결국 그런 갈망을 이루지 못하고 집에서 더 책을 많이 보게 되었지만, 우연히 빌린 책 속에서 누군가 내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면 그 사람을 단숨에 사랑할 것 같다. 영적인 교류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릴지도 모르겠다. 스물다섯 살의 권태에 빠진 콩스탕스처럼 말이다.
 

  로맹 가리를 무척 사랑하는 콩스탕스는 그의 책을 아껴 읽기 위해, 그리고 다른 작가들을 사랑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회원으로 가입한다. 일반회원이 되는데 80프랑이 필요함에도 기꺼이 가입을 하는 콩스탕스를 보면서 우리나라 도서관은 참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사진과 가족관계증명서 한통만 있으면 무료로 가입되어 책을 바로 빌려 볼 수 있다. 거기다 밑줄이나 낙서한다고 일일이 검사하지 않으니(이건 좋은 게 아닌가?) 나름 책을 볼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콩스탕스는 회원으로 가입한 후 빌려온 책에서 한 줄의 낙서를 보게 된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누군가 규칙을 위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반납하려던 책에서 사서인 지젤이 낙서를 하면 안 된다며 면막을 주는 바람에 또 다른 글귀를 찾아낸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노름꾼』이 좋은 책이라며 읽어보기를 권하자 콩스탕스는 『노름꾼』의 내용과 그 책에 있을 낙서가 궁금해 안절부절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반납자를 도서관에서 기다려 바로 책을 받고서 역시 그 책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콩스탕스에게 말을 걸듯 밑줄이 그어져 있어 그 사람의 흔적을 좇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이런,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군요.' 라는 문장의 밑줄을 보게 되면 어느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거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어지는 밑줄 때문에 혼란스러워 책을 반납했더라도 다른 여자가 그 책을 읽게 된다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리라.



  그렇게 한껏 꿈꾸게 만든 밑줄 긋는 사람은 그 이후에 읽을 책들을 빠뜨리지 않았다. 콩스탕스는 고독하고 진부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밑줄을 찾아 하는 독서가 서서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밑줄을 찾아 독서를 했다면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해 버렸을지 모르나 일상과 맞물리는 밑줄 긋는 사람의 존재는 침착하면서도 빠르게 내면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사람의 흔적을 따라 그를 남자라 확신하고, 그 책을 읽으려는 사람을 찾으려고 했던 것도 어쩜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고, 밑줄 긋는 남자를 찾아도 부질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사람을 꼭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도서관에 도움을 청하게 되고, 의외로 그 사람은 일찍 콩스탕스 앞에 나타난다.

 

  그는 도서관에서 그녀에게 대출을 해주던 봉사활동을 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편지를 받고, 그와 데이트를 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읽은 책들 속에서 드러난 밑줄로 볼 때 더 고상하고, 아름답고, 문학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너무 평범했고, 콩스탕스가 만난 밑줄 속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밑줄 그은 남자 역할을 했던 청년의 고백이 이어지고, 급기야 청년의 도움으로 밑줄 긋는 남자의 정체를 밝혀내려 한다. 도서관 기록을 이용해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좇으려던 그들은 거의 그 남자를 찾을 뻔 했지만, 그가 최후에 남긴 메시지가 들어가 있는 사프로노프란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긴 것도 최근이 아니었다.

 

  밑줄 긋는 남자는 끝내 밝힐 수 없었다. 그렇게 멋진 문장들을 남겨놓고(작가가 쓴 것이지만 밑줄로 인해 그의 문장인 것만 같았다.) 콩스탕스를 무척 설레고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 속의 밑줄은 콩스탕스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다. 소설을 통해 다양한 세상을 보게 만들었고, 사랑하게 만들었으며, 현실에서의 사랑과 이상을 꿈꿀 수도 있었다. 밑줄 긋는 남자와의 이뤄짐이 더 로맨틱하고 애틋하기도 하겠으나, 책 속에 가둬두는 것도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진지하고 독특한 독서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볼 때, 그 사람은 어쩌면 부서지고 상처 입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자는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으로 독자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끌었다. 거기에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남자에 대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긴장감 있게 펼쳐놓아 무척 흥미로웠다. 콩스탕스 뿐만 아니라 밑줄 긋는 남자를 어느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서 문학과 인생의 고독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었다. 마지막에 그 사람의 흔적이 툭 끊긴 것 같아 조금 아쉽긴 했으나, 그 사람을 현실에서 만날 수 없더라도 책 속에서 만난 그 시간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누구나 느낄 법한 갈망을, 드러내지 못한 희망을 이 책은 충족시켜 주었다. 그래서 밑줄 긋는 남자가 추천해 주었던 책들 중에서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책들을 읽으며 그를 떠올려 보려고 한다. 그가 내게 보낸 메시지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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