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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데드히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3종세트를 다 읽고 나니 하루키의 다채로운 문학세계로 들어갔다 온 기분이다. 세 권의 책에서 풍기는 색깔이 조금씩 달라 읽는 내내 색다름을 맛보았다. 단편 하나하나가 모두 독특해서 많은 여행지를 둘러 본 기분이랄까. 다양한 글을 발표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아, 과연 하루키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조금씩 기대하게 된다. 이번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들뜨게 되고, 너무나 생경한 상황 속에서도 자연스레 저자의 의도를 따라가게 된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저자가 흩뿌려 놓은 글의 마력 때문이리라.
『반딧불이』가 환상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고 『빵가게 재습격』은 기발함을 담고 있다면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그래서 이것은 하루키가 쓴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타인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담으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다. 구전 소설처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고, 나와는 먼 나라 얘기라는 기분도 들었다. 첫 단편 『레더호젠』이 그랬다. 독일에서 흔히 입는 반바지 레더호젠 때문에 이혼하게 된 한 여인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타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남편과 비슷한 사람에게 반바지를 입혀보면서 남편에 대한 혐오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글로 풀어내는 효과가 아니었다면 이상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택시를 탄 남자』는 묘한 여운을 남겨 주었다. 화가를 꿈꾸다 결국 큐레이터가 되었지만 자신을 위해 사들인 한 장의 그림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 속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아테네의 택시 뒷자석에서 그림속의 남자를 만난다. 매일 쳐다보던 그림이었기에 단박에 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여행이 되길 원한다며 인사하던 그 남자의 모습을 기억하는 여인. 그러면서 '사람은 뭔가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지워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렇듯 저자는 타인으로부터 들은 독특하면서도 기이한 느낌까지 불러들이는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내면의 사각지대를 여과 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사라져 버렸을 이야기들. 이미 그런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많지 않는 우리의 기울임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런 삶의 모습이 쌓여서 한 사람의 삶을 만들어내고, 다양한 사람들의 형태를 만들어 간다고는 하지만 종종 잊혀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풀사이드』의 한 남자처럼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 그의 고민이 남 일 같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비를 피하다』의 여자처럼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불행의 변화에 비난을 던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당사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때론 말하는 것으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들도 그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자신만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가볍게 꺼냈을 수도 있고, 은밀한 얘기들을 조심스레 들려주었을 수도 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 독특한 경험을 한 셈이다.
가끔 고요함이 나를 지배할 때, 밤 풍경을 자주 지켜보게 된다. 어둔 밤을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면서, 나만 혼자 동떨어진 것은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한 적이 많다. 그런 의문과 궁금증에 하루키가 조금이나마 대답을 해 준 것 같아 위로가 된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삶을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내게 밀려오는 고독에 점령당하지 않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이 사람들처럼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고 해도 그것 또한 내 나름대로는 최선의 삶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