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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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기억난다. 작년 가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발표했을 때의 그 생소함. 부랴부랴 헤르타 뮐러란 작가를 검색해봤지만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책그림책>이라는 책에서 헤르타 뮐러의 이름을 건져 올릴 수 있었으나, 이미 읽은 책임에도 기억이 안나 더 당황스러웠다. 다시 한 번 책을 읽어보아도 그림을 보고 다양한 작가들이 짤막한 글을 쓴 책이라 헤르타 뮐러라는 작가를 알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문학동네에서 <숨그네>와 <저지대>가 출간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헤르타 뮐러의 작품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읽어볼까 하고 구입한 것인 지난 6월이다. 그때라도 바로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저자의 방한 소식과 함께 세 권의 책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를 먼저 선택한 것은 저자의 책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소문에 지레 겁먹지 않으려 비교적 얇은 책을 고르다 먼저 읽게 되었다. 국내에 출간된 다섯 작품 가운데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책이라 약간 떨리긴 했으나, 방한소식과 함께 책 정보와 저자에 대한 소식을 어느 정도 알고 나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약 150쪽의 얇은 책이었으나 짐작대로 가볍지 않은 책이었고, 그녀가 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감히 내가 노벨문학상을 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문학과 결합시키는 과정을 철저히 보아온 느낌 때문이었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실감나는 묘사보다 무심한 듯 툭툭 던져내는 그녀의 문체가 어떤 묘사와 설명보다 더 진솔하게 다가왔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종종 전쟁에 관한 문학을 읽다보면 과연 나라면 어떻게 살아갔을 까란 막막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상상은 일분도 이어지지 못하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을 흩뜨려 버리는 걸로 끝이 나곤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내가 주인공 빈디시의 가족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저런 상황이었다면 과연 나를 온전히 지킨 채 살아갈 수 있었을 까란 질문으로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독재 치하의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독일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곳에 빈디시의 가족이 중심에 있었고, 빈디시의 가족처럼 서구세계로 가기위해 여권을 손에 쥐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권만 손에 쥐면 핍박받는 땅을 떠나 고향에서 맘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여권은 쉽게 쥐어지지 않는다. 여권을 받기 위해 많은 뇌물을 주었음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여권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여권을 받으려는 것인지, 여권을 받으려고 그 치욕을 참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삶의 괴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빈디시는 여권을 받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치욕을 견디면서도 나름대로의 중심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심은 루마니아를 떠나 고향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 그것이 희망으로 비춰지지 않더라도 그들이 여권이 나오길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이웃의 죽음,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을 키운다는 것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일 같았다. "처음에 루마니아 사람들은 히틀러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독일 사람이 있다는 걸 의아해했어.(중략)'아니, 아직도 독일 사람이 있네, 더구나 루마니아에.' " 이런 의아한 시선을 견뎌낸 독일 사람들처럼 빈디시는 나름대로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외동딸인 아말리에를 바치는 일까지 하고 말았다. 빈디시의 아내는 "다들 어떻든 여권을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데, 당신은 아니야. 그렇게 정직하고 잘났으니 어떡하겠어." 라고 말하며 여권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당당하다고 못 박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난할 힘조차 없는 내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그들이 당면해 있는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 철저히 알게 되었다.

 

  빈디시와 개(犬)뿐인데도 '혹시 그림자가 다가와 엿보지 않는지, 엿듣지 않는지 어둠 속을 응시'하는 야간경비원처럼 그들에게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가택수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와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오히려 죽음이 평안해 보일 정도로 느껴졌다면 너무 잔인한 것일까.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확신만 있다면 버티고 버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들 그런 과거가 어떻게 기억될지 뻔해 어떠한 말도 뱉어낼 수 없었다. 그들이 고향이나 고향이 아닌 곳에 돌아가서 현재와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들에게 남겨진 과거는 추억이 아니라 고통이 될 터였다. 정도를 지킬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조차도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삶에서의 내면이라 할지라도 지켜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이 저자의 경험과 버무려져 독특한 문체를 빚어내고 있었다. 저자의 문체는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꾸 헛손질을 하는 것처럼 무모하게 느껴질 정도로 의미 함축적이다. 늘어지지 않는 간단한 문장 가운데서도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다음을 연결하는 발판이 무엇인지를 잊게 만들 때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문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의미를 상실해버리는 함축성 뒤에 숨은 실재의 바탕이다. 소설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현재성,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절망과 희망의 부조화가 그녀의 작품에 자꾸 다가가게 만든다. 그녀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지인이 내게 말했던 "쉽게 읽히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녀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어 좋다."란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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