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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잘 보지 않는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마침 읽고 있던 <순교자> 때문이었다. 뉴스에서는 6.25 전쟁 60주년을 알리는 동시에 미공개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을 읽다 말고 혹여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흔적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란 헛된 망상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TV를 봤다. 늘 감흥 없이 지나치던 한국전쟁을 관심 있게 바라보게 된 것만도 생소했다. 6월 25일이 되면 한국전쟁을 얼핏 떠올리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60주년의 사실을 숙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순교자>를 읽고 애국심으로 먹먹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전쟁의 비극과 절망 앞에서 무너졌던 사람들, 기적 같은 힘으로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전쟁의 참혹함속에 절망감을 낱낱이 맛본 탓인지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양심을 저버린 건 당신이고, 양심을 지킨 건 또 다른 당신이라는 판단조차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무너질 수 있고,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 다만 그에 대한 판단이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다는 것이 버거워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신의 존재여부와 영역에 대해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시종일관 독자의 내면을 건드리는 소설을 따라갈 밖에는.
저자의 이력이 독특해서 잠시 펼쳐본다는 것이 그만 끝까지 읽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장은 쉼 없이 넘어갔고, 격렬한 흐름보다 담담한 차분함이 나를 이끌었다. 정보장교인 이 대위는 육본 정보국 평양 파견대장 장 대령의 지시에 따라 독특한 사건과 얽히게 된다. 전쟁 직전에 공산군에 끌려간 14명의 목사 가운데 12명이 총살당하고, 단 두 명이 살아남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한 목사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진실을 말하길 거부하는 신 목사가 있었다. 장 대령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이 사건을 조사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진실을 감추고 선전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장 대령이 생각한 것처럼 계획적이고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드러내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서의 충돌은 흥미진진하면서도 곧 무너져 내릴 건물을 붙들고 있는 것 마냥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 대위는 장 대령의 지시로 신 목사를 만나 처형 당시의 상황을 알고자 하지만 신 목사는 말을 아꼈다. 오히려 불편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사이는 팽팽하게 당겨지다 느슨해지기를 반복하며 신뢰가 쌓여간다. 서로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모종의 신뢰는 점점 사건의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 대위는 장 대령의 뜻도 신 목사의 뜻에도 동조할 수 없는 입장을 밝혀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교인들은 12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드높이고, 신 목사와 한 목사를 배반자 유다에 비유했다. 신 목사는 교인들이 자신을 비난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처형 당시의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발언이 교인들을 난폭하게 만들었음에도 스스로를 배반자라고 칭했다. 장 대령과 이 대위는 신 목사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12명의 목사가 순교자처럼 숨을 거두고 남은 두 명의 목사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둘의 의견이 엇갈리기만 한다.
장 대령은 신 목사가 열두 명의 목사를 미화시키는 데 진실을 말해버릴까 전전긍긍하고, 이 대위는 장 대령이 진실을 은폐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며 자주 충돌한다. 신 목사는 열두 명의 목사가 순교자가 아니고 그 안에 배반자가 있으며 부역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처형당할 때 그곳에 없었다고 말했다가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고 번복하면서 끝내 그들이 순교자가 아니었다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장 대령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은 장 대령의 생각을 뛰어넘는 계획 밖의 행동과 신념이어서 장 대령 또한 신 목사를 존경하게 된다. 한편 이 대위의 친구이자 열두 명의 목사 가운데 한 명의 아들인 박인도는 아버지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궁금해 한다. 광신도인 아버지와 연을 끊다시피 살아온 그였기에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할 때 신 앞에서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지 궁금해 한다. 처음엔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해주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장 대령의 추진 하에 함동추도예배가 진행되고 열두 명의 목사를 미화시키는데 신 목사, 박인도 등이 참여하게 된다.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 또한 진실의 중요함의 유무를 떠나 신의 자녀임을 온전히 드러내는 사람. 그들의 팽팽한 논쟁과 일련의 사건 흐름은 독자로 하여금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독자의 질문을 이 대위와 장 대령을 비롯한 다른 인물이 해 주었고, 신 목사는 그들의 질문과 협박,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현실을 초월한 듯한 태도로 강한 인상을 심어 주고 있었다. 분명 신앙적인 요소를 가득 담고 있는 소설임에도 신(神)에게는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한 느낌이 든다. 또한 신 목사의 최후에 대한 진술이 엇갈리는 가운데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가 지금껏 보여준 신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좋은 인연으로 만나 인연을 지속시킬 수 있지 않았을 까란 안타까움이 일기도 했다. 결국 "신은 과연 우리의 고난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떠한 대답도 얻지 못했지만, 그 물음에 모든 것을 바쳐 대답하려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