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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아무리 견디기 힘든 감정도 시간의 흘러감에 따라 옅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나쁜 감정을 묵혀두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은 좋은 일이나 잊지 말아야 할 감정을 잊는 다는 것은 때론 쓸쓸함을 유발시킨다. 갈수록 망각의 속도가 빨라지는 현대사회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만 제대로 알아도 삶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로인해 과거의 아픔은 미래의 발판이 되고, 현재의 치열함이 자신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며, 내면을 건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그런 깨달음을 어둡고 음침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죽음의 목도가 아닐까 싶다. 진정으로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쉽게 잊어 버렸다는 것을 <애도하는 사람>을 통해 상기해서인지 무상한 말들을 구구절절 읊게 되었다.
나조차도 잊어버린 죽음, 혹은 나만 알고 있기가 너무 애통한 가족의 죽음을 타인이 애도해 준다면 기분이 어떨까. 경계가 되면서도 괜히 고맙고 때론 불쾌하면서도 호기심이 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사카쓰키 시즈토가 그랬다. 방송매체나 신문, 소문을 듣고 사람이 죽은 곳에 찾아가 애도를 했다. 독특한 손 모양과 자신이 알아낸 고인의 기억을 되새기며 애도하고, 다른 사람이 죽은 곳을 찾아 떠났다. 전국을 돌며 그렇게 애도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그가 왜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생판 모르는 타인의 죽음을 일일이 기억하려는 그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왜 애도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그렇게 애도한다고 해서 무엇이 남으며, 삶이 아닌 죽음에 더 매달려 있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도 그에 대한 답은 속 시원히 풀리지 않았다. 그의 고백과 행동으로 조금은 수긍하게 되었고, 어머니의 시선에서 풀어낸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함을 인정하게 될 뿐이었다. 시즈토의 애도 여행에는 크게 세 인물이 얽혀 있었다. 기사 거리를 위해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만 찾아 골라 다니며, 그의 삶도 무엇엔가 구겨져 있는 인상을 받게 되는 신문 기자 마키토 고타로. 남편을 죽이고 출소한 뒤, 남편을 애도하던 시즈토를 따라 다니는 나기 유키요. 시한부 선고를 받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시즈토를 기다리는 엄마 사카쓰키 준코의 시선이 번갈아 드러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시즈토가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시즈토가 그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는 지 궁금해 열심히 책장을 넘기다가도, 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내포되어 있어 다른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시즈토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났기에 흐름을 놓칠 수 없었다. 그의 기이한 여행 때문에 여동생인 미시오의 결혼에 문제가 생기고, 반대로 고타로는 몇몇 기사가 호응을 얻었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시즈토가 애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연스레 드러났음에도, 정작 시즈토의 행위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할 사람들에겐 큰 성과를 내진 못했다. 그런 오빠가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를 버리고, 어떻게든 기사 거리를 만들려는 사람을 보면서 시즈토의 행위가 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자신의 가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여동생에게 이런 일이 있는지도, 무엇보다 엄마가 죽어 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게다가 유키요가 시즈토와 동행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애도에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았다. 시즈토 행위 자체야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시즈토의 애도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어서 오히려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어깨에 붙어있는 죽은 남편의 영혼은 기이하면서도 짜증을 유발시키기도 했고, 늘 휘둘리는 유키요가 답답했다. 유키요를 통해 시즈토와 남편의 영혼이 얘기를 하게 되면서 사연이 풀려 둘 다 자유로워진 것은 참 다행이었다. 유키요의 삶이 가벼워 진 것에 시즈토의 역할이 컸지만, 유키요가 갈 곳이 없어 시즈토를 따라다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한편 시즈토의 엄마 준코는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다. 고타로를 통해 시즈토가 건강하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안심하지만,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세상을 떠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우여곡절 끝에 시즈토에게 전해졌는데도 사촌의 장난으로 치부하고, 애도여행을 계속 하는 그 앞에서 더 이상 어떤 기대도 갖지 않게 되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엄마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시즈토가 온 마음을 다해 애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온 몸을 부딪혀가며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시즈토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로인해 얽혀지는 이야기와 타인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의 공백을 메워나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어렴풋이 깨달을 뿐이었다. 고타로가 자신이 한 행위 때문에 십대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시력을 잃은 후, 열렬히 시즈토에 대해서 알리고 다니는 것을 보며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단 몇 명뿐이어도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즈토의 애도와 행동은 그만큼 독특했다. 애도기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꼼꼼히 기록해 간 노트며, 어릴 적 죽은 새에게 보여줬던 손동작 하며 그만의 신선함까지 묻어났다. 무엇보다 오랜 애도여행 끝에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또 애도 행위를 의미 있게 하기 위해 세 가지 요건으로 애도하는 것이 노하우라면 노하우였다.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
죽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이런 식으로 애도를 했기 때문에 그는 많은 오해를 샀다.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칭해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 이런 부분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 사실이 드러나면 이 질문에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애도했으며, 그래야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유일한 인물로 마음에 새길 수 있'다고 말했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가 너무 괴로워 '자살하는 대신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랬기에 그의 애도를 가족조차도 막을 수 없었고, 고인을 기억하는 주변 사람들도 그의 애도 방식에 어떠한 뜻도 관철시킬 수 없었다.
시즈토가 너무나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아니면 그의 곁에 자리한 유키요가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되어서인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부분은 준코가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부분이었다. 어디서나 아들의 모습을 믿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시즈토를 만날 수 있고 딸 미시오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던 그녀. 혹여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족하다는 그녀의 태도는 죽음을 애도하는 시즈토의 모습과 상반되면서 더욱 빛을 발했다. 미시오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는 준코의 의식은 죽음과 생명의 탄생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떠나갔다. 삶이 오는 것과 죽음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순리대로 살아가는 시즈토의 가족을 보면서 어쩌면 그도 순리를 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애도가 어디까지 이어질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애도가 어떠한 파장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에게 시즈토의 행동은 경각심을 일으킬 만 하다는 것이다. 시즈토만큼 독특하게, 온 마음을 다해 애도를 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의 죽음이 잊히듯 훗날 있을 나의 죽음도 그렇게 잊혀 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시즈토가 그렇게 위로해 준다고 생각하자 그제야 그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다가왔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어떻게 살아왔건 간에 긍정적인 일화로 그 사람이 잠시 머물렀던 이 세상에서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애도하는 사람인 시즈토의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