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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어런스 - 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보급판
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김세중 옮김 / 뜨인돌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꿈을 꾸었다. 무척 추웠고, 온통 눈으로 덮인 곳이었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배의 잔해 속에서 갈 길을 몰라 쩔쩔맸던 것도 같다. 너무 두렵고 겁이 나 퍼뜩 깨어보니 얼굴 아래에는 <인듀어런스>가 놓여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책의 배경이 그대로 꿈으로 흡수되어 나타난 것이다. 창밖으로 드러난 휴일 오후의 날씨는 너무나 화창해 나의 꿈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공부하고 있는 내 주변 사람들을 보기가 민망해 물을 한 잔 마시고 돌아와 다시 책을 읽었다. 도서관에서 읽으려고 여러 권의 책을 가져왔으나 결국 이 책만 오랜 시간 정독하다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 책을 찬사하는 지인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도 이 책에 관한 언급을 보았다. 이제 읽을 때가 왔구나 싶어 고요한 장소에서 온전히 마주하고자 책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던 것이다. 책을 읽는 중간에 너무 나른해 잠이 들고 말았지만 꿈속에서조차 책 내용이 나올 정도로 나를 붙들어 맨 책이었다. 싱그러운 5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극 한가운데 있는 착각이 일었으며, 고립 가운데 존재한 절망감과 고독이 온 몸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들은 여전히 고립중인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고, 이들의 이야기가 잊힐까 조바심이 일었다.
책의 부제를 보면 '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 라고 되어 있다. 부제만 보고도 그들의 남극 탐험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대원들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니 '위대한 실패'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도전은 실패했더라도 '부하를 먼저 생각하는 리더로 널리 인정받'은 섀클턴의 세세함을 알고 싶었다. 이 책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어서인지 인듀어런스 호의 출항부터 조난, 대원들이 구조되는 과정을 주로 담아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를 읽어보라는 지인의 추천으로 그 책을 읽을 시기를 고르고 있다. 인듀어런스의 대원 가운데 사진작가 헐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할 정도로 생생한 사진들이 '위대한 실패'를 받아들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섀클턴과 비슷한 시기에 남극 탐험을 나선 탐험가는 스콧이다. 처음엔 스콧의 기록을 앞지른 섀클턴이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재정문제로 허덕이고 있는 사이 스콧은 또 한 번 남극 탐험에 나섰고, 결국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섀클턴도 인듀어런스 호를 타고 남극으로 떠났지만 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고 모든 대원이 살아서 돌아왔다. 한 사람의 목숨도 스러지게 두지 않고 돌아온 섀클턴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모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출발할 당시만 해도 영국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였지만, 곧 전쟁이 터져 중단될 뻔 했다. 해군성에서 계속 진행하라는 전보로 그들은 예정대로 탐험을 계속할 수 있었고, '그의 낙천성'이 '탐험가로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섀클턴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결정적인 순간에 후퇴하지 않았다면 대원들의 목숨은 물론이고, 또 다른 기회를 엿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듀어런스 호가 남극권에 들어설 때만 해도 부빙에 갇혀 배가 침몰하리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려움이 따랐지만 순조로운 항해였고, 부빙에 갇혔어도 해빙기를 기다리며 탐험이 지속되길 바랐다. 힘겹게 얼음을 깨는 작업을 하면서 배가 앞으로 나아가길 간절히 원했지만, 짧은 여름마저 지나가 버렸고 섀클턴은 항해를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끔찍한 추위와 고독, 지루한 나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남극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희망이 있었기에 인듀어런스 호에서 생활을 하면서 종종 축구도 하며, 물개도 잡으며 나름대로의 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빙에 갇혀버린 인듀어런스 호의 주변 배경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헐리가 혼신을 다해 찍은 사진에는 그들이 항해 중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잠깐 얼음이 녹아 항해를 할 수 있었으나 다시 부빙 사이에 배가 끼면서 인듀어런스 호는 강풍에 기울기 시작했고, 12개월 동안 그들의 집이었던 배는 침몰했다.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며 비통한 마음을 드러낸 섀클턴을 비롯해 많은 대원들이 절망했다. 인듀어런스 호가 없이는 남극도 고향으로도 돌아갈 수 없을 거란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행동개시에 나섰다. 안전한 부빙 위에 캠프를 설치하고, 최소한의 짐만 유지한 채 행군에 나섰다. 섀클턴이 먼저 시범을 보여 금화와 시계를 비롯한 짐들을 버렸다. 구명 보트 두 척을 끌고 가는 힘든 행군이었기에 쉽게 지쳤고, 많이 이동하지 못했다. 대원들 간의 긴장감도 일어났고, 기본적인 식생활에 대한 어려움도 뒤따랐다. 물개를 잡아먹으며 생활을 영위해가던 그들은 섀클턴의 뜻에 따라 두 번째 캠프에서 보트 세 척을 나눠 타고 엘리펀트 섬으로의 항해를 시작했다. 어렵게 섬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섀클턴은 또 한 번 특단을 내려 6m의 갑판 없는 배를 타고 1,000km 떨어진 조지아 섬에 가기로 한다. 일정 시기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이 섬을 떠나라고 조취를 취한 후 22명의 대원을 남겨두고 6명만이 불가능한 항해에 나섰다.
그렇게 떠난 제임스 커드 호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실패한다면 28명의 목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터였다. 그들이 조지아 섬에 도착한 과정을 어떻게 나의 짧은 식견으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을 안은 채 출발해 무사히 조지아 섬에 도착했고,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또 다시 무모한 계획을 실행한다. 3사람을 남겨 둔 채 섬의 동쪽 해안인 허스비크로 가기로 한 것이다. 모든 대원들이 무사히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역시나 불가능에 불가능을 더 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계획이었다. 섀클턴을 포함한 세 사람의 여행은 최대의 고비였다. 길을 잘못 들어 눈 덮인 능선을 몇 차례나 오르내리고, 36시간의 여행 끝에 포경기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누더기에 고래 기름 연기로 얼굴까지 까만 그들을 보고 사람들이 기겁했던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대원들의 구조가 급박했기에 생존의 기쁨은 뒤로한 채, 삼손 호를 타고 먼저 대원 세 명을 구하러 떠났고, 엘리펀트 섬에 남아 있는 대원들을 구조하기 위한 계획을 논의했다. 섀클턴의 생존 소식은 영국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지만, 구조할 배도 찾기 힘들었고 얼음 장애물로 엘리펀트 섬으로의 귀환은 늘 실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칠레 정부로부터 ‘옐코’ 호를 빌려 타고 엘리펀트 섬에 도착한다. 섬을 향해 똑바로 전진하는 배와 그 배를 바라보는 대원들, 그리고 그들의 해후. 그 부분이 가장 감명 깊었고,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눈물이 왈칵 올라왔음에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섀클턴은 가장 먼저 22명의 인원을 확인하고 그들을 태운 후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섀클턴은 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디어 해냈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우리는 지옥을 헤쳐나왔소.' 라고 말했다고 한다.
섀클턴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이 구조에 나서면서 고생한 만큼 엘리펀트 섬에 남아있던 대원들도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절망가운데서 대장이 오길 기다렸으며, 모든 것이 부족한 춥고 삭막한 섬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엘리펀트 섬에 남겨진 대원중에서 몇몇은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어느 누가 고생을 덜했냐는 판가름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할 뿐이고, 그들 모두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무사히 귀환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이 남극 탐험에는 실패했을 지라도 ‘위대한 실패’를 이끈 섀클턴과 나머지 대원들에게도 모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을 그들은 모두 뚫고 나왔다. 섀클턴의 표현대로 ‘지옥’을 헤쳐 나온 그들이 부디 그 모험을 잊지 않길 바랐다.
후기를 통해 그들이 무사히 귀환한 후를 살펴보니 참 많은 감회가 밀려왔다. 기나긴 환영식이 있은 뒤 모두들 삶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또 다시 몇몇 대원들과 소규모로 탐험에 나섰지만 섀클턴은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심장 발작으로 47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의 소식도 모두 전해주었지만, 인듀어런스 호에서 맺었던 보이지 않은 유대감은 사라져 버린 뒤라 무언가 허전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영광이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인듀어런스 호의 대원으로 남아있었을 때의 영광이었다. 탐험정신과 고난, 모험과 용기는 오래가지 않았고, 오로지 그들의 가슴 가운데 남아있을 터였다. 삶은 그런 것이라고 인정했음에도 씁쓸함이 밀려왔고, 그들이 하나하나 삶을 마감할 때마다 서운함과 허무함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탐험가였고, 용기를 드러낸 사나이들이었다. 생생하게 드러난 사진과 잘 정리된 글을 통해 당시의 그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무척 귀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아득한 곳으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지만, 마음속에 인듀어런스 호와 대원들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그들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