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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ㅣ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매일 발걸음을 하는 도서관에 가지 않은 이유는 날씨 때문이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 때문에 도무지 도서관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젖은 바짓단을 끌며 오갈 생각을 하니 정신이 혼미해져 오늘은 집에서 좀 쉬자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독서를 했다. 사무실에 비상용으로 가져다 놓은 미니북 <냉정과 열정사이>를 우연히 꺼내 읽다 흥미가 일어 집에 가져왔고, 그 길로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왔고, 현재 나의 상황이 아오이와 현저하게 닮아 있다는데서 오는 기묘함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냉정과 열정사이> 영화를 본 것은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였을 것이다. 2004~5년 사이었을 것이고, 당시의 마음 상태 때문이었는지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남아있던 영화였다.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만난 터라 책을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막연하게나마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이런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리고 당시 24~5이던 나는 서른이 되었고, 아오이의 생일이 있는 5월에 이 책을 읽었으며, 비오는 날을 싫어하고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는 내 자신과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은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서른을 맞은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무척 쓸쓸하게 다가와 마음 한켠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냉정과 열정사이> ROSSO와 BLE 중에서 BLE를 먼저 꺼내든 것은 츠지 히토나리 때문이었다. 이 책을 쓴 두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츠지 히토나리의 문체가 좀 더 좋아 먼저 선택하게 된 것이데, 끝까지 읽지 못하고 초반을 헤매다 덮어 버렸다. 그리고 숙명처럼 내가 서른 살이 된 5월, 아오이와 쥰세이가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2000년 5월에서 꼭 10년이 흐른 오늘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조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딱 들어맞음이 기시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없이 아오이의 내면에 빨려 들어갔던 것이고, 빗소리도 듣지 못한 채 정신없이 책을 읽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무척 서정적이었다. 그것이 오늘 끝까지 책을 읽게 만든 첫 번째 이유였고,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도서관에 가지 않는 상황과(도서관에 갔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5월이라는 시간적 공간이 나를 더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꿈꿔 마지않는 잔잔하고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상의 묘사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자잘한 풍경 묘사들로 인해 자연스레 아오이가 보는 풍경을 떠오르게 했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오히려 특별함을 느끼게 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없이 늘어놓는 이국 풍경들, 음식, 취향, 음악, 책 등이 나를 사로잡았고, 그런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꿈꾸는 일상을 살고 있는 그녀의 내면에는 비밀스런 무엇인가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완벽한 미국인 남자친구 마빈이 있었다. 보석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아오이를 보고 첫 눈에 반해 동거를 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무척 친절하고, 지적이며, 마음도 물질도 넉넉했으며 아오이를 무척 사랑하고 아낀다. 그것을 아오이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녀 역시 그의 정확함과 허벅지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떠날까 불안해하는 마빈을 안심시키지 못하는 불안감이 그녀에게 내제되어 있었다. 조각조각 흩어지는 과거, 일본에서의 추억이 그 원인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잊히지 않은 이름 쥰세이. 그의 이름이 떠오르고, 그와의 추억이 조금씩 상기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아오이는 과거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그에게서 오랜 세월 동안 남아있던 오해가 풀리는 편지 한 장이 날아오자 아오이의 삶은 흔들리고 만다.
그만큼 쥰세이의 존재는 강렬했고, 잊을 수 없었으며, 그리움과 사랑하는 마음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것이 마빈을 불안하게 했고, 아오이 자신조차 장담할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빈이 아오이의 삶 속에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하는 순간 아오이는 집을 나온다. 그리고 충분히 그를 잃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그를 잃어버리는 데에 어쩔 수 없음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녀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고 생각한 쥰세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발견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일까?
쥰세이와 아오이는 약속을 했었다. 아오이의 서른 번째 생일날 밀라노가 아닌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오르자고. 그리고 밀라노에서 살고 있던 아오이는 서른 번째 생일 날, 자신에게 그런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듯 충동적으로 피렌체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날 거라 생각 못했던 서로를 만나게 된다. 아오이와 쥰세이는 그렇게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만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은 채 또다시 헤어진다. 아오이가 마빈과 헤어졌다고 쥰세이에게 말했다면 쥰세이는 아오이를 붙잡았을 것이다. 또한 쥰세이가 떠나지 말라고 한 마디만 했다면 아오이도 쥰세이 곁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놨으며, 무엇이 그토록 오랫동안 간직해 온 사랑을 아무렇지 않은 듯 되돌아가게 만들었을까. 그것 역시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 모호한 사랑이야말로 그들의 진심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는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영화의 장면들이 모아졌다. 온전한 합체라고 할 수 없고, 결론을 알고 있는 읽기였고, 영화 속 주인공으로 인물들을 상상하는 한정적인 틀 속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섬세한 묘사와 잔잔한 일상을 만나고 있노라면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아오이의 내면은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쥰세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아오이 또한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고, 기다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아오이에게 "사람이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라고 말해준 지인의 말을 확신이라고 하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