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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디노의 램프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루이스 세풀베다의 신간이 발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안 돼 책을 구입했음에도, 읽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신없이 쌓여가는 책들 때문이기도 했고, 몇 편의 단편을 읽고 책을 덮어 버리고 방치한 탓도 있었다. 그렇게 읽다만 단편들이 흩어질까 봐 다시 책을 잡고 부랴부랴 읽었지만 역시나 책을 덮고 나니 내게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았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집을 대할 때마다 드는 느낌이라 그다지 생경하지 않았지만 흩어져 버린 이야기들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난감했다.
총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알라디노의 램프>는 저자의 <외면>이나 <소외>에서처럼 다양한 장소의 다양한 사람들의 독특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옮긴이는 '작가의 삶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인생 여정과도 같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열두 편의 단편들은 이러한 작가의 여행, 즉 작가의 삶을 담아낸 것이다.'라고 했다.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듯한 글들은 그런 배경 때문인지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읽다보면 지명과 등장인물의 이름들이 무척 생경해 흐름을 엉키게 만든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연유로 낯선 세계의 낯선 이야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저자 특유의 익살이 드러나는 작품 앞에서는 책을 읽다 깔깔 거리며 웃기도 했다. 요즘 책을 읽다가 깔깔 거리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의 나라면 절대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곳에서 웃는 모습을 보며 놀랄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웃었던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해주면 공감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책의 흐름을 읽고 분위기를 느껴야만 웃음을 터트릴 수 있기 때문인데 <죽은 시인들과의 저녁 식사>에서도 그랬다. 온 종일 번 돈과 구두약을 도둑맞은 어린 아이를 광장에서 발견하고 여러 친구들은 그 아이를 도와주기로 한다. 당연히 얼마간의 돈을 쥐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많'은 어른들은 샌들을 신은 친구의 발까지 서로 짓밟아 구두를 더럽힌다. 광이 번쩍이는 신발과 밤색이 되어버린 친구의 발을 보고 놀라워하는 친구에게 태연스럽게 "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는 영혼을 광내고 있었어." 라고 하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에피소드 앞에 정치적인 죽음과 관계있는 친구들에게 애도를 표한 후 "친구들은 그냥 그렇게 죽는 게 아니다. 우리 곁에서 죽어 가는 것이며, 잔인한 힘이 우리에게서 친구를 뺏어가고, 우리는 뼛속에 허전함을 담은 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우울하거나 역사 때문에 고통 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면서도 할 말 다하며 써 내는 일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딩동! 딩동! 사랑이 찾아왔어요>에서는 강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잦은 헤어짐을 겪어야 했던 청년에게는 "사랑은 고통 말고도 다른 가능성도 제시해 줘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메모지를 붙여 '맞아, 고통은 너무 힘겨워. 마비시킬 뿐이야.' 라고 붙여 놓을 정도였다. <섬>에서는 손을 잡는 여인에게서 "손은 몸에서 유일하게 거짓말하지 않는 부위에요. 열기와 땀, 떨림, 힘. 그게 손의 언어이지요."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렇듯 루이스 세풀베다는 사랑, 정치적인 요소, 일상의 이야기를 때로는 걸쭉한 표현들이 섞인 이국적인 이미지로 그려 놓는다. 모든 글에는 저자의 내면이 담겨 있고, 경험이 있으며, 추구하고 싶은 삶의 욕망이 가로지르기도 한다.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 때로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 흐름을 읽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목적지가 아닌 생뚱맞은 곳에 내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온전히 흡수될 수 없었고,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만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경험이 녹아 있는 이야기 속에 '삶'이 주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몇 편의 단편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언급했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이 책의 느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내겐 벅찬 일이다. 특히나 루이스 세풀베다의 단편은 저마다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통틀어서 얘기할 수 없는 축에 속한다. 장편소설이라면 어느 정도 줄거리를 추려낼 수 있을지 모르나, 독특한 단편들의 모음은 새로운 세계의 모험이라 여운을 챙길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펼쳐놓은 세계로의 여행은 조심스러우면서 흥미를 돋운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저자의 여러 작품을 만나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의 안내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언제나 나의 무한한 신뢰에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고, 큰 여운을 남겨주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게 다가오는 작가이기에 자꾸 그를 찾게 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