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뒷목이 뻐근한 게 새벽까지 무리해서 책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잠을 이기지 못한 책이라면 알아서 일찍 잠이 들었겠지만, 잠을 이겨내도록 흥미로운 책을 만나면 이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책을 다 읽고 잔다. 늘 그 뒷감당을 이기지 못해 허우적대면서도 욕구에 대한 호기심은 충족시켜야만 직성이 풀린다. 다른 것에 그런 끈기가 있다면 좋으련만. 오로지 책에 대해서만 그런 열망이 인다. 그렇게 새벽에 책을 덮고 나면 평상시와 더 예민한 감정들로 둘러싸이게 된다. 이질감, 감동, 낯섦, 분노 같은 감정은 낮보다는 밤에 더 색깔이 짙어진다. <소수의견>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드러난 진실과 결과 앞에 망연자실하고 나의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으면서도, 다음 날이면 나에게서 떠나간 지 오래된 감정이 되고 만다.

 

  서울의 한 도심 재개발지구에서 두 명이 죽었다. 철거민들을 진압하던 전경 한 명과 그곳에 있던 16세 소년이었다. 소년은 철거용역업체의 직원에게 맞아 죽었고, 아들을 방어하기 위해 아버지가 휘두른 각목에 경찰이 죽었다. 두 명이 죽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뭔가가 이상했다. 너무 쉽게 사건이 무마되었고, 현장이 보존되지 않았으며, 죽은 소년의 아버지 박재호는 특무방해치사로 구속 기소되어 있었다. 박재호는 아들을 죽인 사람이 경찰이라고 했고, 경찰은 철거용역업체의 직원이 죽였다고 했으며 이미 자신의 죄를 인정한 김수만도 특수폭행치사로 피소되어 있었다. 그 사건은 국선변호사인 '나'에게 맡겨졌다. '한 달에 서른 개씩 돌아오는 국선 사건 중 하나. 다들 고개를 내저었던 지저분하고 무가치한 사건.' 이었기에 '나'밖에 맡을 사람이 없었으리라.

 

  진실은 알려면 할수록 더 달아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또한 깊숙이 개입할수록 들어간 사람만 다친다는 사실을 이토록 치사하고 옹졸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없었다. 진실의 이면을 캐려고 하자 모두들 생각해 주는 척 비웃었으며, 변호사의 지위에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험한 말들만 오갔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신문 기자 준형, 법대 교수 재민, 같은 사무실을 쓰는 대석 등으로 인해 이 사건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언론에 사건을 노출시키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심이 쏠렸고, 벌떼같이 달려들어 이 사건에 도움을 주겠다는 손길이 넘쳐났다. 그들은 언론 플레이의 막강한 힘과 그에 따르는 부작용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끼면서도 최대한 언론을 활용해 진실을 파헤쳐 승소하길 원했다.

 

  사건의 진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야 할까. 경험하고 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히면서도 한 가지 생각만은 또렷했다. 하나의 진실을 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답답함. 최후의 공판이 진행 될수록, 판결이 가까워질수록 답답함은 더 심해졌고 책을 덮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무엇을 알려고 했던 것이며,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피해자와 검사, 변호사,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변론하고 파헤치고 숨기려 했는지 끝끝내 알 수 없었다. 드러난 결과 앞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추려낼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의 눈에는 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으며 겨우 하나의 사건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느낌뿐이었다. 온전한 진실은 없었으며 진실을 인간이 판단하고, 판결하고, 죄에 대가를 문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 넘는 일이었고 신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건의 내막은 그랬다. 재개발지구를 향해 탐욕스런 손길을 뻗는 손길과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투쟁. 그 과정에서 경찰이 소년을 죽였고, 소년의 아버지는 경찰을 죽였다. 이 사건의 수사기록을 처음 넘겨받은 홍재덕 검사는 즉시 문제점을 발견했고, 자신이 생각한 소중한 것을 위해 판단했다. 이 사건을 은폐하기로.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위해서였고,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한 개인이 판단했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무언가 석연찮다. 그가 진심으로 소중한 것을 생각했다면, 그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고 두 번 다시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국가에 로비를 하는 재개발지구의 건설회사, 사람이 죽어 나가든 철거민들의 집이 사라지든 이익에만 눈 먼 사람들, 치부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에 꼬리를 붙여 계속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들의 모습에 나를 비추어 되묻고 있었다.

 

  단순히 죽음만을 감추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이면에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과연 푼다고 풀릴 것인지에 대해 사건을 맡은 '나'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고, 좋은 전략이 있었으며, 진실 된 사람들을 만나 일이 잘 풀리기도 했다. 한 몫 잡아보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잠시 박재호의 변호사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며, 국선 변호사를 관두고, 100원의 국가배상청구소송 청구서를 냈으며, 중요한 증인과 증거를 얻었다가 잃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이 이 책에 녹아 있었으며, 특이한 점은 '나'가 변호사인 관계로, 또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법정소설의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누구의 시선도 아닌 법의 테두리에 갇힌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다. 책의 구성 또한 사건의 진행에 따른 법률 용어들로 되어 있어 그런 용어로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초반에 애를 먹기도 했다. 부록에 용어의 뜻과 다양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거의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거나 마찬가지라,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법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사실이 갑갑했다. 느려지는 속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독하게 되었고, 그 시간이 지루하기보다 스스로에게 대충 읽지 않았다는 만족감을 부여하고자 꼼꼼히 읽어 나갔다.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뜻을 알았다고 해도 수많은 법률 용어와 그 용어들이 사건 안에 자리하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더라도 소설의 흐름을 읽는데 큰 걸림돌 없이 무난했으며, 법안에 갇힌 사건의 이모저모를 빠져나오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공판이 있는 3일 동안의 기록은 나름대로 빠른 흐름을 타고 읽었지만, 용어를 모른다는 답답함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국민참여재판을 연 것이나, 증인과 증거에 대한 불투명성,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가운데서도 진실을 알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한 판의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잔인한 게임, 진실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면서도 이기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전략을 짜야 하는 게임.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그들이(정확히는 법조계 사람들과 진실을 숨기려는 사람들) 오히려 안쓰러울 정도였다. 빤하게 흘러가는 흐름 속에서 현실감을 잃고 있지는 않았으나 기적도 없었고, 온 몸을 휘도는 감동도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보여준 진심 앞에 숙연해지기도 했으나 인간이 내린 판결 앞에 그런 감정 나부랭이 따윈 애초부터 포함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맡은 '나'는 결국 패소했다. 그러나 박재호의 삶에 완전한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건 하나 때문에 너무나 많은 후폭풍이 밀려왔다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 속에 잊힌 사건은 또 일어날 것이며 승소하거나 패소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을 겪어본 자들이야말로 법은 한낱 몸부림과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실은 절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도 소수요, 제대로 된 양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소수라는 것만 알려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든지 소수는 다수가 될 수 있으며 주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기에, 소수의 사람이 만들어낸 소수의견을 무시하고 살고 싶진 않다. 소수가 자리를 탈바꿈 했을 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지 예측할 수 없더라도, 그 모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저자는 소설을 퇴고한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파일이 날아갔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파일을 복구해 빛을 보게 된 이 소설은 그런 사연만큼이나 독특하다. 법과 사건을 촘촘히 엮은 것이나 마치 사건을 보고하듯 무미건조하면서도 툭툭 쳐대는 문체, 어느 누구도 주체가 되지 않는 시선들이 그랬다. 해설을 맡은 이정현님은 이 소설이 '용산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으나 '용산을 떠오르게 한다.'고 했다. 나도 용산 사건을 익히 안다. 그러나 세세하게는 모른다. 내가 말한 세세함은 뉴스에 조그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게 되는 사건의 흐름을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자세히 모르는 용산 사건을 더 잘 알게 된 기분이 든다. 마치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아버린 것 같은 씁쓸함이 나를 옥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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