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뿔 - 이외수 우화상자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세상은 보편적으로 소설가 이외수를 별로 탐탁지 않은 인간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문명인으로서는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지극히 비과학적이며 지극히 비위생적인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산출된 평가다.(95쪽)' 이외수란 작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그의 작품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나 또한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보이는 그대로 왜곡해서 보고 들려오는 풍문으로 그를 판단했다. 그의 작품을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했고, 지인이 이외수의 책을 몇 권 건네주었음에도 책장에 방치하고 있었다. 어제도 박스 가득 도착한 책 가운데서 이외수의 <외뿔>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을 주려고 훑어보다 읽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순전히 깔끔한 겉표지와 글씨가 많지 않은 내용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외뿔>이라는 책을 통해 이외수란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어느 정도 벗겨냈다. 다른 작품을 읽고 나서도 이 마음이 유지될지 어떨지 모르겠으나, 닥치지도 않은 걱정거리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외뿔>을 보면서 오랜만에 상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현대소설에서 걸쭉한 말 빨로 유발시키는 억지웃음이 아닌 뼈아픈 유머가 있으면서도 호쾌하게 뱉어내는 웃음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겪인 물벌레가 그런 웃음을 던져 주었는데, 저자의 우화 속에서 여러 역할을 자처하곤 했다. 물속의 미국계 조폭인 베스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씁쓸함을 느끼기도 하고, 물벼룩 앞에서는 자존심을 세워 센 척 한다. 물벌레의 인생은 우리네 인생과 빗대어져 있었고, 깔깔거리며 웃다가도 뭔가 묵직한 느낌을 동반했다.

 

  우화집인 만큼 저자는 그림과 짤막한 글로 수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있었다. 화두는 인간을 향한 것들이 많았지만 우화 속에는 인간보다 자연이 더 많이 등장했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물벌레와 물풀 등을 등장시켰듯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관심을 갖지 않는 미미한 존재들이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탐욕에 물들고,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며, 세상 때에 찌들대로 찌든 모습으로 등장하기 일쑤였다. 양심을 져버리는 정치인, 성공에만 집착하는 사람들, 외국 문물에 물든 젊은이, 자연을 파괴하는 모습들로 비춰졌다. 그런 인간세계를 물벌레를 비롯한 다른 물고기들이 자기네 세상에서 표현해 주었기에 너무나 잘 와 닿았다. 그 모습에 맘껏 웃고 씁쓸해 했으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갔다.

 

  물벼룩이 전반적으로 고루 등장하기에 물벼룩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지만 주인공이 누구이며 이러이러한 분위기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인생, 사랑, 미물, 환경, 종교, 도(道) 등 실로 방대하고 다양한 우화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때론 정신없게 보이기도 한다. 등장 소재들이 뒤죽박죽 거릴 때도 있고, 웃겼다가 깨달음을 줬다가 분노하게 만들었다 정신을 쏙 빼놓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고, 짤막한 글 속에 담긴 진리를 만날 때면 오랫동안 글을 응시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나의 마음을 울리는 글들을 만날 때면 몇 번씩 읽어보며 이면을 보려 애썼고, 현실의 나를 마주 보는 글을 만날 때면 괜히 한숨이 지어지며 서글퍼지기도 했다. 진정한 사랑은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내면을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그대는 진실로 거룩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글 앞에서 어찌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움을 뱉어내는 달팽이를 보면 인생의 고독을 깨닫게 되고, 세상과 조화가 아름다움이라고 설파하는 물벼룩을 보며 현재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전부를 내맡긴 채 살아가는 방법 하나로 일체의 갈등과 욕망에서 사라진 생명체'인 물풀 앞에서 내 존재가 미미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고기들 간에 먹고 뜯기는 살벌함 앞에서 움츠러들기도 하고, 개량변이 되어 등장하는 도깨비를 실감나게 그려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바라보기도 했다. 다양한 분위기 속에 빠져 여기저리를 헤매다 보면 어느새 책은 끝나가고 있었고, 열등감에 시달리고 절망감에 좌절하던 물벌레도 하늘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생의 축약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외뿔>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언저리가 모두 똑같을 수 없고, 순간순간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것을 통달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 부분이 나와는 조금 맞지 않았지만 여전히 소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 미물들을 보면서 세상은 아직 인간의 흔적으로 때 묻지 않은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위치에서 미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무시하다 그보다 못한 미물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물처럼 느껴졌다고 자괴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미물의 위치에서도 내면을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귀한 진실을 말이다. 내면을 아름다움으로 채워 거룩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단지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이유와 고개를 돌려 다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진실 된 마음을 갖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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