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의 지붕
마보드 세라지 지음, 민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기분을 바꾸고 싶을 때는 마음과 반대인 것들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가령 기분이 우울하다면, 밝은 곳을 산책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고 싶어 한다. 그런 억지가 통하지 않을 때는 차라리 현재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방법을 통해 나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며 한껏 만끽한 뒤 빠져나오곤 한다. 요즘 나의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아 퇴근 후에는 오로지 독서에만 집중하고 있다. 현실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독서에 열중한다는 것을 앎에도 쉽게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아직 우울한 기분에서 빠져 나올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중에 내게 다가온 책들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테헤란의 지붕>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장소설이라는 말에 혹해서 읽게 된 책인데, 성장 소설 안에 국한되는 그 이상의 것을 만나고 말았다. 성장통의 아픔과 함께 정치적 상황까지 맞물린 암울함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 소설이었다. 암울함만 드러냈대도 전혀 탓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을 내세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함은 물론 역사의 현장을 처절할 정도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몸부림을 쳐봐도 그들이 마주한 현실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열일곱 살 소년 파샤는 단짝 친구인 아메드와 지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테헤란에서는 무더위를 피해 지붕에서 자는 것이 흔하다고 한다. 해마다 지붕에서 떨어진 사망자가 급증해도 그들에게 지붕은 또 다른 삶의 공간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희로애락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파샤와 아메드가 매일 밤 만나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곳도, 짝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만나는 곳도 지붕이었다. 그만큼 테헤란에서는 지붕이라는 공간이 집이라는 한정된 곳을 벗어난 오픈 된 공간으로써, 모든 것을 바라보며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파샤조차도 지붕에서 보내게 될 수많은 시간들이 그렇게 고통스러울지 알지 못할 정도로, 공간의 특이성과 삶의 흐름은 이상하리만치 맞물리고 있었다.

 

  파샤가 당면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소설의 배경이 된 1970년대의 이란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이란은 친미 정권 팔레비 왕조가 비밀경찰 사바크를 앞세워 반정부활동을 철저히 탄압하던 암흑의 시기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인권 탄압이 있었음에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파샤의 동네에서, 테헤란 대학 정치학과에 재학 중인 '닥터'라고 불리는 청년의 죽음이었다. 현 정권에 대항하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시바크에게 붙잡혀 주검이 되어 돌아온 사건은 파샤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닥터가 잡혀 가던 날, 지붕위에서 그의 약혼녀 집에 있는 닥터를 바라봄으로써 경찰에게 알려줬다는 죄책감이 파샤를 괴롭혔다. 닥터가 잡혀가기 오래전부터 약혼녀 자리를 짝사랑해 온 파샤는 많은 감정이 내면을 흔들고 있었음에도, 닥터를 존경하고 좋아했기에 자리에게 어떠한 고백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처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닥터가 잡히기 전, 파샤는 아메드와 그의 여자 친구 파히메의 도움으로 자리의 집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마치 꿈을 꾸듯 행복한 시간을 보냈기에 파샤는 닥터가 죽은 뒤 미안함과 죄책감이 날로 커져갈 수밖에 없었고, 늘 꿈에서 닥터를 만나 모든 것을 고백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닥터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힘겨웠는데, 닥터의 부모님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무엇보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자리가 분신자살 하는 것까지 봐야 했다.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하던 자리가 그런 일을 자행했다는 것은 파샤에게 닥터의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책의 시작은 파샤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어떻게 조각난 기억을 더듬어 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책의 중간 중간 병원에서의 파샤의 모습을 따로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암울함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 기억의 조각은 자리가 분신자살 하던 날로 맞춰진다. 그러나 기억을 되찾은 파샤에게는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를 짝사랑했던 애틋한 마음, 닥터의 죽음, 거기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자리의 죽음까지 열일곱 살 소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들이었다. 고통의 드러남은 처절했고, 온전히 독자에게 전해져 함께 울며 가슴 아파 하며 팍팍하고 부당한 현실에 애통해 했다. 그럼에도 자리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고통이었다. 힘겹게 이어 온 실이 툭 끊기듯, 자리의 죽음은 파샤에게 앞으로 남아 있을 삶의 희망을 꺾을 만큼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그런 파샤에게, 힘겨운 일을 당한 닥터의 부모님이나, 자리를 잃은 가족들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동네 이웃이었다. 삶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움츠러들면서도 끈끈해져 갔고, 그 안에서 인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파샤가 닥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피를 흘렸던 곳에 장미나무를 심어 줄 때도 동네 사람들이 함께 돌봐 주었고, 당면한 현실에 울분을 토할 때마다 자상한 아버지는 파샤에게 에둘러서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또한 파샤에게 아메드가 가장 큰 힘이 될 정도로 둘의 우정은 깊었고,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부러울 만큼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인 것이 감사했다.

 

  그런 와중에도 소설과 독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 준 것은 아메드였다. 언제 어디서나 익살로 사람들을 웃겼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아메드를 보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좀 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그 나이에 걸맞은 고민을 하면서 즐겁게 보내면 좋으련만, 보통 어른들이 겪기에도 힘에 부치는 일들은 그들을 피해가지 않았다. 그런 현실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를 저자는 너무나 글로 잘 풀어내서 가슴이 절절하면서도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사건과 내면이 촘촘히 엮어가는 과정이 너무도 충실해 대충대충 읽을 수 없었고, 마치 파샤가 된 기분이 들 정도로 뛰어난 묘사와 표현력은 내가 당면한 절망감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파샤가 바라는 그 한 가지는 독자의 내면을 뚫고 올라와 나의 희망이 될 정도였다. 목숨을 내 놓아도 아깝지 않을 자리를 다시 찾아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것. 하지만 현실은 파샤의 꿈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소설이 끝나 버렸다면 절절한 가슴을 부여안은 채 몇날 며칠을 마음 아파했을지 모르겠다. 암울하고 팍팍했던 역사의 한 시기를 읽느라 한껏 늙어버린 기분이 들 정도로 절망감을 맛보았기에, 저자가 파샤에게 준 선물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것은 파샤에게 희망을 넘어 앞으로 펼쳐질 캄캄한 인생에 한 줄기 햇살을 비춰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기치 못한 반전을 바라보며 그동안 촘촘히 엮어온 흐름에 약간의 구멍이 생겨 버린 것 같다고 못된 마음을 품기도 했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을 읽고 나서 며칠 후,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잠시 파샤에게 가졌던 냉소가 얼마나 나쁜 마음이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인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지, 내 경험과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저자가 파샤에게 준 선물은 나에게도 큰 희망이 되었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이 같이 싹트고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언제든지 삶을 다시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은 셈이다. 이런 많은 깨달음에도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로 기억하고 싶다. 뜨거웠던 청춘을 상징하는 사랑. 그 사랑이 온전히 이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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