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생소한 작가의 경우라도 나와 조우한 첫 작품이 맘에 들면 전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만난 작가들 중에서 전작이 진행 중인 작가도 있고, 전작 가능성을 엿본 작가도 많다. 그 가운데서도 좀 특별한 작가가 있다면, 아마 루이스 세풀베다가 아닐까 싶다. 남미 문학에 관해서 무지했던 내가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읽고 전작을 하기로 마음먹고, 다음 작품으로 <지구끝의 사람들>을 읽었다. 그 책을 통해 <모비딕>까지 연결되는 독서를 경험하고 나서 루이스 세풀베다의 팬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의 책을 모두 소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흐름이 한 번 끊기자 다시 잡기가 힘들었는데,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그의 책을 꺼내게 되었다. 순식간에 그의 책을 읽어버렸고, 이 만남으로 인해 멈춰졌던 전작에 대한 흐름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모두 소설일거라 생각했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를 읽고 나서야 다른 책들을 꺼내 살펴보게 되었고, 다양한 장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기행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의 경험이 어우러져 있어 생생함과 소설적인 느낌을 모두 내포하고 있었다. 크게 4부로 나뉜 책의 구성은 읽어 나갈수록 점진적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1부는 할아버지의 추억이 녹아있는 유년시절을 시작으로 정치범으로 구속되어, 출감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을 읽었다고는 하지만 작가에 대해 익숙한 것도 아니고, 남미의 분위기,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배경도 내게는 여전히 낯설었다. 그래서인지 1부를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저자의 문체는 덤덤했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 바닥으로 더 내려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2부는 감옥에서 출감하여 자유의 몸이 되어 칠레 주변국을 전전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망명자 신세라서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지 못했다. 국경을 넘을 때도, 한정된 일을 하며 여비를 얻을 때도 고뇌의 빛이 보였고, 다행히도 글에서 묻어나는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절망이 아니었기에 그의 글을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런 생활이 계속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장담이 보였기에 그의 행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듯, 3부에서는 자유로운 몸이 되어 이곳저곳 여행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2부와 3부의 돌아다님이 어떻게 보면 별 다를 바 없게 느껴졌더라도, 글에서 주는 색깔이 확연히 달랐으므로 3부에서는 맘 편하게 저자의 기행을 만끽할 수 있었다.

 

  3부에서 저자의 기행을 맘껏 만끽하고 보니, 왜 이 작품을 기행문학이라고 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1, 2부를 읽으면서도 충분한 기행문학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으나, 저자에게 처해진 억압된 분위기가 독자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저자가 자유의 몸이 된 직후에야 독자인 나도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이 작품의 밑바탕은 여행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저자가 경험한 것들과 수없이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기행의 원천이 되었고, 생소한 남미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특징이 두드려졌던 곳이 3부였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한 독자가 지켜보기에 독특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넘쳐났다. 저자가 경험한 이야기와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덧대어져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내겐 전혀 생소한 나라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생경함이 묻어나는데, 저자는 무척 담담하게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런 차분함이 오히려 화려한 묘사보다 몰입을 할 수 있게 만들었고, 내가 현재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지 잊게 만드는 묘함을 안겨 주었다.

 

  그렇게 3부의 신비로움이 끝나고 '마지막 부 도착노트'에서는 새로운 감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1부에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녹아있었다고 말했는데, 할아버지는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주며 '네 스스로 읽어야 할 책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가지 약속을 던져주는데 첫 번째는 여행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르토스'에 가야한다고 한다. 그곳이 어디냐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자는 할아버지와의 두 번째 약속을 향해 마르토스에 가는데, 그곳에서 할아버지의 동생을 만난다. 그 만남이 얼마나 뜨겁고 감격적인지 담겨 있지 않지만, 만남을 향해가는 전조로 보아 충분히 그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내 책장에 꽂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꺼냈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이 책은 위대한 여행의 초대장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저자의 행보를 보아 위대한 여행의 초대장이 되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으므로, 이젠 내가 그 책을 읽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 책으로 나를 초대해 준 것만으로 뜨거운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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