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가 끝난 뒤 - 러시아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박종소.박현섭 엮어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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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출판되는 책들을 살펴보면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세계문학이다. 문학을 좋아하다보니, 그런 흐름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인지도 모르나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반가울 따름이다. 굵직굵직한 출판사에서 새롭게 발행하는 세계문학의 홍수 속에서 독특한 시리즈를 만났다. 작가를 중심으로 책을 펴내는 것이 보통인데, 나라별로 단편을 모은 창비세계문학 시리즈였다. 당연히 관심이 갔음은 물론,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문학에 눈독을 들였다. 이미 읽은 작품도 있고, 생소한 작품도 있었지만 러시아 단편문학을 묶어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읽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읽기도 전에 한없이 마음이 들떴다.

 

  책을 읽으면서 더 친근감이 들었던 것은 익숙한 작가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모두 읽지 못했더라도 단편집으로 묶인 책에서 한꺼번에 만나니 또 다른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2명의 작가를 제외하고, 작품으로 만났거나 이름을 들어본 작가라서 읽기에는 전혀 부담이 없었다. 오히려 작품의 구성상 작가별로 따지기보다 단편을 통해서 러시아의 내부로 들어가 러시아인의 모습을 살펴보는데 더 용이했다. 작가의 명성과 내가 아는 작가라는 알은체를 잠시 접어두니 작품을 순수하게 느낄 수 있었고, 러시아 사람들의 삶 속에 온전히 들어간 기분이었다. 작가들이 활동한 시기와 작품속의 주인공들이 당면한 현실의 차이가 있긴 했으나, 기존의 러시아 작품을 통해 약간의 기본배경이 있어서인지 풍부한 단편을 만난 것 같았다. 서문에 '양식사적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고려함과 동시에, 각 시기의 사회상과 역사적 배경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중시했'다고 했으니, 단적인 느낌으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다 '단편소설의 날카로운 형식적 특성을 잘 살린 작품을 고르고자 애썼다.'고 했으니 배제되는 작품에 대한 판단에 대해 허물이 없길 바란다는 글도 실려 있었다.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시기를 정하고,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작품을 싣고자 하는 열정이 묻어나는 구절이었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반가운 작품집이 아닐 수 없으나,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작품을 싣다보니 밝은 작품은 드물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던 시기라서 작가들이 글을 쓴다는 것도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작품 속의 인물들의 삶은 팍팍했고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다양하고 복잡다단한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저자가 직접 독자의 입 안에 넣어주지 않는, 독자적으로 깨닫거나 아니면 설명을 통해서 겨우겨우 수긍할 수 있는 메시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의 단편들은 모두 강렬한 느낌을 주었고, 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흐름을 타며 이야기가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짧은 분량에도 상관없이 이야기는 깊이 각인되었고, 책을 읽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작품들이 있기도 했다. 그런 작품들이 나의 일상을 찬란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작품보다 시절의 비극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아 이질감을 느끼는 한편, 인간의 존재감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복수하기 위해 인생의 상당부분을 할애하는 사람, 외투 때문에 목숨을 잃은 관리,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일하는 노동자, 부자간의 비극을 태연히 말하고 있는 청년, 암소의 죽음을 표현하는 소년 등 주제만으로 충분히 비극적이고 암울함이 묻어난다.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고 단적인 설명으로 작품을 전반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이런 사건의 이면을 뒤집는 작품들도 많았다. 그런 뒤집힘 때문에 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헷갈려, 독자적으로 느껴야하는 메시지가 많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슬픔'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날'을 연상시킬 수 있었고, '입맞춤'은 꿈에서나 나올 법한 설렘이 가득한 소설이었다. '입맞춤'은 내가 혼자서 간직하고 있던 환상을 모두 들춰내는 것 같아 마음이 덜컹하면서도 내내 설레었다. 사랑을 한다면 그런 마음으로 시작 하고 싶지만, 주인공이 끝내 가지게 된 허무함을 간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썩 유쾌하달 수 없는 단편의 내용들을 보면서도 어디선가 삶을 부진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름과 다름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러시아인의 기질을 보여주는가 하면, 삶의 팍팍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함을 소설을 통해 사건으로 마주하면서 다양함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었다. 그런 삶을 살아온 혹은 여전히 살고 있는, 어디선가 존재할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러시아 문학의 사료적 가치를 떠나서라도, 러시아인의 응축된 삶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 귀한 경험이 되어 주었다. 다소 낯설게 다가왔을 법한 러시아 소설이 살갑게 다가온 데는 러시아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이 섞여있을지 몰라도, 한 권의 책으로 러시아 문학을 만날 수 있어 소중한 시간이었다.

 

  책 속의 짤막한 단편을 읽다보면 이야기 속에서 방황할 때가 있었다. 암울하고, 좌절감을 맛보며, 때로는 설렘을 안겨주기도 한 13편의 단편은 전혀 닮지 않은 새로운 감정을 실어 나르기 바빴다. 13편의 단편을 일일이 언급하기도 벅차거니와, 이 작품들이 러시아 단편문학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러시아 단편 문학에 대표 격인 작품이라고 해도, 그들이 가진 기질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여러 작품을 자주 접해서, 작품 속에 녹아든 메시지와 이방나라의 삶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그럴 때에 문학 속에서의 풍부한 가치를 더 맛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해보며, 세계문학의 끊임없는 발굴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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