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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즌 파이어 2 - 눈과 불의 소년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놀 / 2010년 1월
평점 :
두메산골에서 자란 탓에 어릴 때 눈을 참 많이 보고 자랐다. 폭설이 내리면 고립이 되고 마는 동네라, 초등학교 때는 마냥 좋았었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인 곳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하루 종일 뛰어 다녔다. 그러다 눈이 녹으면 그렇게 서운했고, 눈 속에 파묻혀있던 실체가 드러나면서 소리도 다시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눈으로 덮여있을 땐, 오로지 고요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사라지면 온갖 잡다한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기억 가운데서도 유독 잊히지 않는 추억 하나가 있는데, 눈으로 덮인 앞산에서 대금 비슷한 소리가 들렸던 경험이었다. 이른 아침이었고, 눈이 쌓여 좋다고 마당으로 나왔는데 그 소리가 들렸다. 세상은 온통 고요했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것이 과연 진짜였는지 착각이었는지, 종종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억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열다섯 살 소녀 더스티가 경험한 것처럼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눈 덮인 세상에서 고요를 느끼고 악기 소리로 인해 조금은 몽환적으로 기억되고 있는 나에 비해, 더스티는 끔찍함으로 기억되고 있다. 혼자 남겨진 집에서 어떤 소년으로부터 받게 된 전화 한통으로 더스티의 삶은 모조리 흔들려 버리고 만다. 번호를 조합해서 전화를 걸었다는 소년은 자신의 정체를 모호하게 밝힌 채, 더스티의 마음 가운데 가장 큰 상처로 남아있는 조쉬 오빠의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을 조쉬로 부르고 싶으면 부르라는 말부터, 조쉬 오빠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뇐다. 더스티는 정체모를 이 소년이(느낌으로 소년으로 짐작하고) 오빠에 대해서 알고 있다 생각하고, 독촉하지만 죽고 싶다는 말만 들려올 뿐이었다. 소년을 찾아 눈으로 뒤덮인 숲을 헤매다 더스티는 흰색 밴을 가진 사람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한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만끽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기억이 아닐 수 없었다.
더스티에게 일어난 그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과 자신을 위협했던 괴한, 오빠의 가출, 그로 인해 엄마는 집을 나갔고,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고 있는 아빠까지 더스티가 감당하기에 벅찬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아빠를 비롯한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가운데, 소년의 전화는 예고 없이 걸려왔고, 여전히 답답한 말들만 들려올 뿐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쉬 오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자신의 번호와 자신의 마음을 읽는 말들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지 묻고 또 물었지만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둘의 대화는 현실의 대화가 아니라 꿈속을 헤매듯, 정상적인 소통이 되지 않고 있었다. 더스티의 진전되지 않는 일상과 내면의 심경, 소년의 두문불출이 1권의 전반적인 내용을 뒤덮고 있어, 조금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았다. 거기다 오빠인 조쉬가 왜 가출을 했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오로지 그 소년에게서 조쉬 오빠의 흔적을 강하게 느낄 뿐이었다.
더스티에게 처해진 현실과 피폐해진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심히 불편한 일이었다. 가족이 힘이 되어줘야 하는 상황에서 더스티는 기댈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와 오빠의 부재가 무엇보다 힘들었고, 아빠가 큰 힘이 되어 주었지만 자신의 고민을 모두 털어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툭하면 다퉜고, 점점 조쉬 오빠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오빠가 더 그리울 뿐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다가온 소년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임으로 더스티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소년이 더스티에게 전화한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더스티가 소년을 숨겨주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그 소년의 불편한 행적이 여기저기 떠돌고 있었다. 더스티네 학교에 전학 온 안젤리카에게 들은 내용으로 신비로운 소년은 온통 투명에 가까운 하얀 형상을 하고 있었고(더스티 자신도 목격한 것과 같았다),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말했다. 그 소문으로 인해 소년을 쫓는 무리, 더스티와 소년을 함께 묶어 위험에 빠뜨리려는 무리들이 점점 더스티를 향해 올 뿐이었다.
더스티는 그 신비스런 소년에게 오로지 오빠의 소식을 알고 싶었다. 어떠한 형상을 하고 있든, 소년의 정체가 무엇이든 오빠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감당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이 위기에 처해질수록 더스티도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졌고, 소년은 더스티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온통 하얀 모습을 간직하고, 불꽃을 만들며, 더스티의 내면을 알고 있고, 많은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소년. 자신을 힘들게도 했지만 가장 큰 위로를 던져주고 고독을 알아주었던 소년. 결국 경찰과 안젤리카의 의붓아버지로부터 오해를 받고 쫓아온 무리를 뒤로 한 채 호수로 차를 몰고 뛰어들고 만다. 그리고 호수 안에서 소년의 흔적은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았고, 밴 근처에서 조쉬의 사체가 발견이 된다.
더스티는 소년이 성폭행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과 조쉬 오빠가 왜 자살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소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더스티의 내면을 헤집고 다니며, 자신을 이해해주고, 마음 아프게 하고, 위기에 처하게도 하고 구해주기도 했던 그 소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소년인지 소녀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가운데, 더스티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면을 갖추고 있으면서 신비로운 모습을 내내 보여주었던 소년. 무엇보다 조쉬 오빠의 흔적을 찾게 해주었기에 더스티는 그 소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소년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오긴 했으나, 엄마와 아빠를 되찾았고,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오빠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조쉬 오빠가 한 행동이 더스티에게는 큰 짐으로 남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오빠의 부재의 이유와 함께 이미 과정으로 충분히 보아왔다. 책의 마지막에 가서야 짧게 밝혀진 조쉬 오빠의 죽음에 결정적인 원인이 나왔듯이, 더스티는 그것을 찾아 헤맨 것이 아니었다. 오빠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온 몸을 휘감아 돌 때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은 더스티에게 오빠를 잃은 상실감을 치유해 주었다. 온전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기보다, 힘든 과정을 통해 더스티 스스로가 상처 안에서 빠져 나오며 그 고통을 이겨내도록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상처를 안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도 나타나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그런 정황을 비추어 볼 때, 소년은 자신 안에 상처로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독자들은 그 소년이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스티를 통해 많이 배웠을 거라 생각한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이 눈 덮인 배경과 함께 한 소년이 우리에게로 찾아왔다. 책 내용이 모호하게 느껴진다면 현상 하나하나에 사실적인 면을 되짚기보다, 과정을 되새기며 더스티에게 자신을 대입시킬 때 더스티의 내면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는 정작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그 주체는 자신이라는 것을 더스티를 통해 알아가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