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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밤새 내린 비 탓인지 안개가 온 도시를 휘감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가시거리가 좁아 출근시간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엇엔가 둘러싸여 있는 기분은 하루 종일 나를 지배했고, 여전히 넓어지지 않은 가시거리 때문에 마음까지 답답해졌다. 이런 날이면 으레 뜨뜻한 방바닥에 누워 재미난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 사무실에서 종일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퇴근 후 안개를 뚫고 종종걸음 치며 집으로 돌아가 나의 바람대로 뜨뜻한 곳에 누워 한 권의 책을 펼쳤다. 하루 종일 안개에 갇힌 마음을 걷어내고자 펼친 책이었건만, 내가 마주한 안개처럼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소설을 만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너는 모른다>의 절반은 서울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읽었다. 다섯 시간을 버스 안에서 보내야 했기에 올라가는 길에 모두 읽어 버렸는데, 책을 덮으니 강남터미널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왜 이 버스를 타고 있는지, 내가 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어느 곳에도 동화될 수 없는 상황에 몸서리 처지는 이질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막상 서울에 도착하고 보니, 이 소설 속의 한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 강남터미널에서 걸어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구절이 생각이 났다. 유지가 집을 나와 제일 먼저 도착했던 곳. 내가 도착한 곳이 그 터미널이었고, 그곳에서 유지는 지하철을 타고 사라졌다. 잠시 나의 목적지에서 발을 돌려 20분만 걸어간다면, 유지네 가족이 살고 있는 그 집으로 당도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안개를 보며 이 소설을 떠올렸고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드나들었던 곳을 다녀와서 그런지,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끈적끈적하게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기분이 든다. 정이현 작가의 작품은 <달콤한 나의 도시>밖에 읽지 않았는데, 도시의 삭막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아 그다지 유쾌한 소설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기도 했는데, 띠지에 적힌 '눈부신 비상'이라는 단어가 책을 읽고 나니 그제야 나를 뚫고 들어왔다. 만약 나의 선입견으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한 작가는 한 작품으로 평가된 채 나의 주목을 못 끌었을 거란 생각이 들자 등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묻혀버린 작가와 작품이 얼마나 많으며, 그것을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11살 소녀 유지가 사라져 버리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닿았을 절망감이 내게는 그런 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의자를 들썩이고 싶은 간질거림, 책의 뒷부분을 열어 결말을 읽고 싶은 조바심이 나를 지배해도 꿋꿋이 책을 읽어 나갔다. 글자 하나가 나의 몸을 훑고 지나가도록 훈련을 시키듯, 꼼짝없이 소설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속독이 붙지 않아 페이지를 술렁술렁 넘기지 못해 정독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상황을 내가 처한 상황이라고 착각하며 읽어 나갔다. 이 이야기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자, 하나로 융화될 수 없는 제각각인 다섯 명의 이야기였다. 가족 중에 가장 어린 유지가 사라지는 사건으로 인해 가족의 고통과 내면은 복식구조로 어지럽게 드러났고, 그런 서술방식 때문에 결말을 쉽게 짐작할 수 없어 지난했다. 한없는 답답함에 종종 숨을 쉬어주지 않으면 내가 견디지 못할 정도로 드러나는 가족의 내면은 낱낱 했으면서도, 속 시원히 보여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지를 찾는 것이 가족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사안이긴 했지만, 각각 살아가던 한 가족이 서로의 존재에 대해 어떠한 몸짓을 해야 하는지 방법이 숨어 있는 소설이기도 했다.
장기 밀매 업을 하는 가장 김상호, 화교출신의 부인 진옥영, 전처 아이인 아들 김혜성, 딸 김은성, 그리고 재혼 후 태어난 김유지가 가족의 구성원이었다. 유지가 사라져버리기 전까지, 평범하다면 평범하달 수 있는 가족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정작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아빠와 첫 부인의 아이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나머지 구성원들도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는 평행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는 삶이었다. 은성만 유난히 되바라지고 삐뚤어져가는 모습을 드러냈을 뿐, 모두의 내면에 감추어진 상처나 분노, 고통은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유지가 사라진 것이 어떻게 다가올지 가늠할 수 없었다. 가출인지, 유괴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한 달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가족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은 독자에게도 고통 그 자체였다.
그동안 무심했던 가족들 모두가 그 아이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죄책감과 상실감이 뒤범벅되어 가는 모습은, 당해본 자만이 알거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당면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아이 하나를 찾는데 만 온 힘을 쏟아도 소설의 무게가 가중될 법 한데,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의 모습은 처절하고 가엾었다. 유지가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던 데는 김상호의 직업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어느 누구도 김상호가 장기 밀매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일단 경찰에 신고하면 그의 사업은 소상이 밝혀지고 만다. 그런 사연 때문에 김상호는 탐정을 고용했고, 사설탐정이 이 가족을 조사해가는 과정 속에 얽혀 들어가는 가족 개개인의 모습은 녹록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심정을 다 드러낸다고 생각했지만, 퍼내고 퍼내도 밑이 보이지 않는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말하는 저자의 문체는 낭랑했다. 유추하며 넘어갈 수밖에 없는 뜻 모를 단어의 나열은, 오히려 한 가족이 처한 상황을 빗겨가듯 신선하고 명랑했다. 그 언어 가운데 유지는 사라졌다 나타났고, 가족이라 부를 수 없는 구성원들이 모습을 되찾아가고, 조금씩 가족이라는 형태를 만들어갔다. 그 가운데서도 가족과 독자를 괴롭혔던 것은 유지의 생사확인이었다. 사건의 발단을 만들었듯이 유지가 어떠한 모습으로라도 드러나야 그들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동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지가 사라진 날, 그 아이의 일정이 하나씩 베일을 벗겨 갈 때마다 숨죽였고, 그 끝이 드러났을 때 허망하고, 안타깝고, 부질없음을 느꼈다. 유지가 살아 돌아온 것에 무조건 감사를 던질 수 없었던 것은, 그 아이의 본래의 모습의 잃어버림으로 인해 비로소 가족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 같은 희생이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옥영의 말대로 ''가족'의 문제라는 것을.(271쪽)' 깨닫는 순간이었다.
한 가족의 이야기였지만, 어느 누구와도 상관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치밀한 구성과 혼신을 다해 쓴 티가 역력한 이 소설로 인해 저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내의 말 못할 사연이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족 구성원의 부재가 얼마나 큰 상실감을 안겨주는지, 하나로 융화되지 못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힘든 과정을 겪어왔고 앞으로 얼마나 큰 시련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그들에게 희망의 빛이 보였다는 것에 안심하게 되었다. 처음 보였던 그들의 모습보다 훨씬 상처 입은 모습일지라도, 그때보다 더 진솔한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서로가 마주 내민 손을 다시는 놓지 않길 바라며, 어찌 되었건 그들이 속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이 일부러 연을 끊는다고 끊어지지 않는 끈끈함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본능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본능에 충실한 채 서로를 보듬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