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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평점 :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은 나오는 족족 구입하면서도, 읽은 책보다는 읽으려고 대기 중인 책이 더 많다. 책장에 거의 전 작품이 꽂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에도 읽지도 않고 신간을 무조건 모으고 있다. 이번에도 신간이 나왔다는 광고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구입해 놓고, 도대체 언제 읽을 것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며 책장에 쌓아 놓는 찰나, 묘한 끌림으로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저자의 다른 책들에 비해 책이 좀 얇다는 것도 있었고, '공항'이라는 소재로 글을 쓴 것이 독특했다. 거기다 공항 소유주로부터 초대를 받아, 히드로 공항에서 일주일을 보낸 기록을 책으로 남겼다는 사실도 흥미를 자극했다. 공항이 나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낯설다고 할 수 없는 공간을 그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펼친 책을 그야말로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저자는 '2009년 여름, 공항을 소유한 회사에서 일을 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아 히드로 공항의 '터미널 5에 작가 한 명을 일주일 동안 초대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에 수락을 한다. 그 회사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출발 대합실 구역에서 책을 쓰기 위한 자료를 모으게 될 것이라는 제안을 들었다. 거기다 어떠한 조건도 없이 '공항의 여러 사업에 관하여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해도 좋다고 분명하게 확인까지 해 주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저자는 일주일동안 특별히 마련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글을 써나가고, 특별히 공항의 직원들을 비롯해 공항의 여러 구역을 돌아볼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다. 그가 이용할 식당 쿠폰까지도.
공항을 자주 이용하지 않다 보니, 공항에서 일주일을 지내며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낼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얼핏 생각나는 것은 공항을 이용하는 승객들과 비행기 연착에 대한 우울한 상념들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접근>, <출발>, <게이트 너머>, <도착>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공항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냈다. 저자의 눈으로 비춰진 공항의 모습만을 그려냈다면, 여전히 공항의 속내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항이라는 유기적인 공간 안에서 저자가 곳곳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솔직함과 능청스러움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거대한 공항 한가운데를 작가 한 명이 소소한 몸짓을 놀려 둘러보고 그에 대한 느낌을 남긴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전체를 아우르는 성찰이 돋보여 다양한 시각을 맛보았다. 룸서비스 메뉴에서 하이쿠를 빗댄 시구를 찾아내는 익살, 공항 CEO를 만나고 나서 출판계와 비교하며 '둘 다 순이익이 아니라 영혼을 흔드는 능력으로 인류의 눈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활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현실 인정이 그랬다. 작가로서의 위트와 이면을 볼 줄 아는 시선, 한정된 장소에서 익힌 생각들을 성찰하듯 드러내는 능력이 알랭 드 보통에게는 내제해 있었다.
네 가지의 주제로 분류해 놓았지만, 그 안에 보통이 드러내는 생각은 주제에 내포된 사람들, 건물, 이동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었다. <접근>에서는 저자가 공항에서 머무는 것에 대한 초대와 생각이 담겨 있었다면, 그 이외의 주제에 대한 글에서는 위에서 나열한 모습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공항 자체가 주는 단정적인 느낌을 나열할거라 단정 지었던 나의 선입견을 깨뜨리듯, 있는 그대로를 말하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었다.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인터뷰 하고, 공항의 곳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공항의 숨겨진 모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공항에서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소소한 공간과 사물에 드러내는 생각들로, 내 주변의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공항에서 마련해 준 사람들이 자신을 모두 볼 수 있는 책상에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도 했는데, 그 뒤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리처드 베이커가 따르고 있었다. 그가 찍은 사진은 단조로운 공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사진으로 보여준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사진과 글이 일치되는 느낌은 쉽게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멋을 낸다거나 과장하는 사진, 진부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사진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글과 무척 잘 어울렸고, 사실적이면서도 공항의 모습을 돋보이는 사진이 많아 구석구석을 살펴본 것 같았다. 오로지 글로만 저자가 머물렀던 곳, 저자가 만난 사람들과 지켜본 광경들이 담겨있는 공항을 상상하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글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 사진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잘 조화시킨 책이 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내가 속해있는 공간을 떠나 낯선 곳에서 일주일을 머무르면, 어떤 느낌일까란 생각을 끊임없이 들게 만들었던 책이었다. 공항의 첫 상주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았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저자처럼 소소한 눈길로, 날카로운 필치로 글을 써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부담감이 더 크게 다가와 평소에 느꼈던 것들을 소상하게 밝히지 못했을 터인데, 저자는 그 기회를 맘껏 누렸고 한껏 써내려갔다. 또한 공항이라는 공간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소재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저자는 공항을 통해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끌어내며 사고를 덧붙였다. 그랬기에 중심무대가 공항이 되기는 했지만, 오로지 공항에서 보이는 모습만 펼쳐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공항이라는 공간을 통해 우리의 삶에 뻗어있는 유기적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항에서의 일주일간의 기록이 삶의 많은 부분을 드러내 보여 줄 것이므로, 잠시 여행을 떠난다 생각하고 저자가 머물렀던 공항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