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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평점 :
드럼학원을 나서니 집에 가기가 싫었다. 종종 레슨이 힘들어 다리에 힘이 풀릴 때면 집에 가기 싫어진다.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마침 지인에게 밥을 사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오오, 이럴 수가! 어찌 나의 마음을 알고 그런 말을 던져주는지 고마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1시간 후나 가능하겠다며, 어디 들어가서 시간을 때우란다. 다행히 가방에 책이 있어서, 1시간의 기다림에도 감지덕지하며 학원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들어갔다. 지갑도 가져 오지 않아, 교통카드밖에 없었기에 마땅히 들어갈 곳이 없었다. 평일이라 한산한 영화관은 책 읽기에 딱 좋았다. 내가 들고 온 책은 한비야님의 에세이였고, 한 시간 후 지인의 연락을 받고 책을 덮었을 땐 80페이지를 읽은 뒤였다.
그만큼 흡인력이 있어 영화관 쉼터라는 사실도 있은 채, 책을 읽으며 울고 웃다를 반복했다. 누가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봤다면 정신을 놓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정을 뒤흔드는 글이었다(그러고 보니 팝콘을 튀기던 직원의 시선이 좀 뜨악했던 것도 같다.).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넋을 놓고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책장을 덮고 있었다. 무척 아쉬웠지만 참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한 권의 에세이에 이렇게 재미나게, 정신을 뺏긴 채 읽어본 적이 언제던가. 한비야님의 책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편안하고, 꾸밈없는 솔직함은 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법이라 독자들이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쉽게 읽히는 글을 머리를 쥐 뜯으며 쓴다는 대목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마음 넉넉하고 푸근한 언니가 이야기를 들려주듯 써내려 간 글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던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이기적인 소재들로 채워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기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말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한비야님이 겪은 일들과 생각들이 담겨 있는데, 어찌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는 말인가. 분명 한비야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속내를 보여주는, 그간 볼 수 없었던 맨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더 편안하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고, 오히려 한비야님의 맨얼굴을 보게 되어서 도리어 내가 더 즐거웠다. 그간 출간되었던 책들을 다 만나지 못해 이번의 맨얼굴의 드러냄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는 못할지언정,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있다는 데에 이의를 달 수 없었다. 월드비전 팀장의 모습으로, 가족으로, 친구로,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드러낸 자신의 모습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대견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 다양한 모습의 면모를 보여주었기에, 한 사람의 인생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기적인 소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구호활동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오지만, 초반에는 한비야님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첫사랑의 기억을 타고 가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등산에 대한 이야기, 지금까지 거쳐 온 이야기도 짤막하게나마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비야님을 따라다니는 그 많은 수식어를 뒤로한 채, 인간 한비야를 그대로 만날 수 있었다. 보통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낌에도 늘 쾌활하고 잘 웃고, 모든 면에 긍정적인 한비야님이 참 예뻐 보였다(한참 나이 차이가 나는 분에게 이런 말이 실례일 수도 있으나, 분명 한비야님은 좋아하실 거다.). 10대 소녀 같은 순수함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일을 할 때는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도 하며,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에게 위로를 던질 줄도 아셨다. 그런 다양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으니 어찌 예뻐 보이지 않겠는가. 거기다 나이와 살아온 과정에 상관없이 생기발랄함이 느껴져 글만 읽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한 권의 책을 통해 온갖 감정이 밀집해 있는 숲을 누비고 온 듯, 마음 한편이 시원해지는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삶을 살아간 자로써, 자신이 거쳐온 과정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모습이 참 좋았다. 내가 용기를 받을 위치에 있어서인지, 던져주는 충고를 모두 받아먹을 정도로 눈이 번쩍 뜨이는 부분도 많았다. 똑같은 말도 직접 경험하고 그 고충을 아는 분이 해주니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그뿐인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 내가 솔깃할 종교 이야기(한 단계 더 도약해 종교에 관해 갖고 있는 신념도 멋져 보였다.), 책 이야기(정말 공감하는 부분도 많아서 즐겁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구호활동을 하면서 겪은 일들까지(우리의 마음에 숨어있는 따뜻한 감정을 잊지 않게 해주었다.) 그야말로 다채로운 이야기의 장(場)이 펼쳐졌다. 각자의 성향에 맞게 한비야님의 글에서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담아두겠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독자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희열이고 위로일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어갈 때까지 책 속의 모습 그대로 현재의 위치에서 머물러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부를 위해 직장을 관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다는 말에 놀라면서도 한비야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도전하고, 행하고, 살아온 세월을 설핏 들춰봐도 현재에 안주해도 될 것 같은데 새로운 것을 향해 기꺼이 가는 용기가 너무 부러웠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연단이라 생각하고 순응하는 모습에 도리어 내가 부끄러워 계면쩍으면서도, 할 수만 있거든 그 도전에 한껏 용기를 북돋워주고 싶었다.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하게 해주면서도 자신이 가야할 길을 덤덤히, 과감하게, 열정적으로 가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타인을 향해 이런 마음을 품어 본 적이 너무 오래라 괜히 망망해 지는 마음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응원밖에 없는 것 같다. 더 큰 희망을 갖고, 더 큰 꿈을 펼치고, 그 과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는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잘 아실 테니까. 그런 한비야님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는 손길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