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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평점 :
제목만 보고 성장 소설일거라 추측하고 냉큼 집어 든 책이었다. 막상 읽어 보니 성장 소설도 아니었고, 생소한 작가에 쓰촨과 티베트 경계인 '지촌' 마을이 배경인 것을 보고 당황했음은 당연했다. 내가 생각한 소설과 양상이 다를 때는 실망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색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어 더 좋았다. 티베트에 관해서는 사진 속의 자연 때문에 무한한 동경만 생겼는데, 책 안에 펼쳐지는 티베트를 만나고 나서 새롭게 각인되었다. 사진 몇 장으로 가둘 수 없는 티베트의 내면을 지켜 본 것 같아 기분 좋은 생경함이 나를 지배했다.
책을 읽고 보니 성장 소설인 줄 알고 펼친 이 책이 내게 또 다른 인연으로 다가왔다는 느낌이 든다. 성장 소설에 관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아라이의 소설을 만나지 못했을 거고, 이렇게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게 괜찮은 책이 나를 찾아 올 때면 책을 읽는 보람을 느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아무런 정보 없이 펼친 아라이의 소설이 단편인 줄 모르고 읽다가 끝나버리는 허무함을 느낄 새도 없이 어색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편인 줄 알고 읽는 책들 가운데서도 무언가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게 끝나는 책들 앞에서 허무하기 마련인데, 아라이의 단편들은 스토리의 전개도 자연스러웠고 묘사도 뛰어났다. 그렇다보니 어떤 지점에서 소설이 끝이 나더라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나 분위기를 느끼다 보면 종종 어느 시대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문명이 닿지 않은 시골 마을이 드러나기도 했고, 이제 새로운 기술이 들어온 마을의 모습이나 혁명이 자리한 사회모습들이 뒤엉켜 있었다.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이야기라서 다양한 이야기가 섞여있는 줄 모르고 잠시 헷갈렸던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티베트 출신의 작가라고 해서 티베트의 온전함을 느낄 거라 생각했는데, 중국과 티베트의 경계선에 자리한 마을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온전히 티베트만의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경계선으로 인해 나라가 다르니 선을 딱 그어 문화가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저자가 불러내는 세계를 탐닉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책을 읽으니 아름다운 자연과 순수함이 그득한 곳의 이야기를 더 진하게 만날 수 있었다.
저자의 시적인 언어와 수수한 묘사도 좋았지만, 그럼에도 '성큼성큼 이야기를 전개하면서(김려령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꼼꼼하게 소설을 완성해 가는 것 또한 이 소설의 매력이었다. 시대의 섞임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을 비교해 볼 수 있었고, 그 안에 인간의 본질을 끄집어내려는 저자의 시도가 늘 엿보였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소소한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기질과 본성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는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마차의 등장으로 마을에서 새로운 인물로 떠오른 곰보는 트랙터의 등장에 밀리는가 하면, 나물을 캐면서 삶을 지탱해가는 소녀의 가출이나, 승려였다가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자로 살다 다시 승려가 되었지만 변해버린 실정에 조용히 사라져가는 라마승 단바의 이야기가 그랬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소재가 되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순수하고 색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접하는 동안, 현재 나의 존재가 진하게 다가오면서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상반된 생각들이 나를 지배해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자연과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저자가 펼쳐놓는 언어의 메타포는 너무나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지명과 이름, 문화가 낯선 이야기임에도 이렇듯 나를 끌어당기는 소설을 너무 오랜만에 만난 터라 이 느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다. 단편들의 줄거리를 쏟아낼 수도 없는 것이고, 인물들과 배경의 나열만 할 수 없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졌던 분위기를 쏟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런 연유다.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단적인 분위기로 드러낸다는 것이 어색하긴 해도, 새로운 세계를 이토록 즐겁게 여행한 경우는 최근 들어 너무 오랜만이라 읽는 내내 마음이 뿌듯했다. 그래서인지 현실과 동떨어지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작품 속의 분위기가 낯설면서도 정감 있게 다가와, 누군가의 비밀을 캐가는 듯 신비로움이 가득했다.
티베트를 비롯해 중국 작가의 작품들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한 터라 낯섦이 거부감으로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색다른 묘미가 전가된다는 느낌과 함께 신선한 기분이 들어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동 중인 버스 안에서도, 한가한 카페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읽었음에도 조우되는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가 당면한 현실 세계는 책 속의 현실과 무척 달랐지만, 한 편의 꿈을 꾸는 듯,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해서 티베트의 한적한 시골 마음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번역되는 과정에서 원 저자의 문체가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책을 읽는 동안 감칠맛 나는 표현과 수수한 묘사들이 의아할 정도였다. 역자후기를 읽어보니 시와 소설을 같이 쓴다는 설명을 들으니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시의 언어로 소설을 써 내는 저자 덕분에 그토록 아름다운 문장을 만끽할 수 있어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