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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ㅣ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7
인고 발터 지음, 유치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고흐에 관한 책을 여러 권 구비해 놓고 읽지 않음에도 새로운 책을 또 구입했다. 책장을 뒤적거리다 'Basic Art Series'를 한 권 꺼내 읽게 되었고, 그 시리즈가 맘에 들어 고흐 책도 구입하게 된 것이다. 고흐에 관한 책이 여러권 있다하더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출판사에 따라 천차만별로 책이 만들어지므로 'Basic Art Series'의 글과 구성이 돋보여 눈길이 갔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만난 고흐는 다른 책에서 만난 고흐와 달랐고, 또 다른 고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울컥해지고 말았다.
고흐의 그림이라면 거의 대부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순전히 내 눈에 익은 정도로만) 때때로 식상하게 다가오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의 고흐 그림은 조금 달랐다. 이미 눈에 익은 그림에다 어느 시절에 어떤 배경으로 썼는지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대충은 알고 있는 터라, 무언가 다른 울림이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책에 실린 고흐 그림은 적절했고, 저자만의 사료(思料) 가득한 고흐의 생과 그림에 대한 해석은 또 다른 묘미를 던져주고 있었다. 고흐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겨우겨우 시대별로 그림을 나누거나, 몇몇 그림에만 배경을 알고 있던 나에게 꼭 맞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냥 지나쳤던 그림 속의 의미를 하나하나 짚어주면서 고흐를 이해하도록, 그가 어떠한 고통 속에서 그림을 그렸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느끼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 밀려오는 저릿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한동안 멍하니 책상 앞에 머물러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힘이 들고, 자괴감이 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고흐가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이 책을 대했음에도, 한 사람의 외면을 통해 내면의 깊이를 독자에게 훤히 보이도록 들춰내는 책이었다. 책의 구성은 다른 책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흐의 태생부터 삶을 마칠 때까지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인생과 함께, 그가 그려낸 그림들이 함께 실려 있었다. 고흐를 말할 때,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빼 놓을 수 없으므로 고흐의 편지가 실린 대부분의 책들이 많다. 저자도 고흐의 편지를 참고로 그런 글을 썼을 테지만, 원문은 그림 옆의 공백에 짤막하게 실려 있어 저자의 매끄러운 글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고흐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의 내면이 어떠했는지,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쓰인 글은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울리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저자의 글을 통해 고흐를 알아가고 있노라면 내가 바로 곁에서 고흐를 지켜보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아무리 심금을 울리는 글이라고 해도 고흐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흐가 어떠한 고통 속에서 어떠한 열정을 가지고 살았는지 알아가기엔 충분했다. 글을 통해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로, 그리고 격정적인 그의 그림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내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내 주변에 이런 인물이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 까란 물음이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가능성을 엿보았더라도 불안하고, 어디로 튕겨갈지 모르는 차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외면해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고흐를 가까이 하기 꺼렸던 가족들과 다른 예술가들, 그리고 아를의 노란 집에서 귀를 잘린 고흐를 나두고 떠난 고갱을 비난할 수 없었다.
고흐가 곁에 있다면 하나의 불덩어리를 안고 있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그림 속에 그의 정서와 상처받은 내면, 열정적인 그림에 대한 욕구는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물론 각자의 시선대로 그림을 보는 것도 좋긴 하지만 유명한 화가라는 사람들의 인식가운데 그의 그림을 스쳐 버리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국내에 고흐 전이 열렸을 때 나만 해도 그랬고, 그림 속의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그의 삶과 그림을 꿰어 맞춰 보니 고흐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분명 독특한 화법으로 표현한 그의 그림은 인상파 화가의 대표 격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런 기본적인 정보 이외에 고흐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생전에 팔린 그림은 '붉은 포도밭'이라는 단 한 점의 그림뿐이었다는 사실일까?(그러나 세간의 주장과 달리, 고흐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유일한 작품은 아니라고 한다.) 아니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까마귀가 나는 밀밭' 이라는 사실일까?(이 그림이 그의 가장 완벽한 유작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후에도 열두 점의 작품을 더 그렸다고 한다.) 틀림없을 거라 믿어왔던 소소한 정보가 이렇게 엇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그를 안다고 말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깨달았을 뿐이다.
고흐의 삶을 다시 한 번 재조명 하면서 느꼈던 불안한 발걸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이었던 의미가 가득 담긴 그림,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그의 그림이 점점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내 마음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너무나 외롭고 긴 고통 속에서 혼자 버티다 결국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가 더 오래 생존했더라면 훌륭한 그림을 볼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감히 할 수 조차 없는 기나긴 고독이었다. 불꽃같은 삶이었지만, 과연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해준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 까란 생각에 나의 무관심조차 몸서리치도록 싫어졌다.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먹먹한 가슴을 어떻게 해야 할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흐의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이 책 속의 고흐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의 삶, 그림, 고독의 무게가 비교적 일치하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 기억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이런 마음 아픔이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고흐의 책을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아가는 고흐일지라도 정기적으로 그와 만나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고 말거라는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왜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지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지지만(처음 그의 그림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내가 보아 온 자연을 너무나 흡사하게 묘사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반복된 글 일지라도 그의 내면을 알아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어쩌면 그의 삶에 빗대어 나의 내면을 보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