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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 같은 내인생 ㅣ 일공일삼 55
샤론 크리치 지음,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집에서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소음이다. 조카들이 넷이나 되다 보니 아무리 조용히 시킨다고 해도 소음은 막을 방도가 없다. TV를 볼 때나 잠 잘 때 외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소음이 나를 괴롭히기에 늘 귀마개를 달고 산다. 그러나 귀마개 틈으로 늘 소리는 끊이지 않고, 조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게 되며, 복도식 아파트라 특히 소음이 심해 늘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어쩔 때는 내가 왜 이곳에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런 환경에서 독서를 해왔다는 것이 마냥 신기할 정도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하소연을 해도 그냥 들어주는 시늉만 할 뿐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레오에게는 왠지 말이 통할 것 같다. 자신의 처지를 통조림 속에 들어있는 정어리 같다고 했으니 레오와 내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나도 대식구 안에서 자라 레오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하지만, 레오도 나름대로 딱한 면이 있다. 삶에 찌들어 있는 엄마와 아빠, 누나, 남동생 둘만으로도 벅찬데, 거기다 조부모를 비롯한 고모들, 삼촌, 사촌까지 그야말로 조용할 날이 하나도 없었다. 형제들도 각각 성향이 달라 레오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엄마는 집안일에 찌들어 있고, 아빠는 늘 무언가 불만이었다. 누나 콘텐토는 사춘기라서 그런지 민감했고, 남동생 피에트로는 럭비에 빠져 있었고, 막내 눈치오는 응석받이였다. 거기다 친척들도 늘 바쁘고 소란스러우니 레오가 그런 불평을 할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레오는 학교 연극반에서 맡은 '꼬부랑 할멈' 역할을 연습하면서, 삶에 대해 조금씩 시각을 트여갈 정도로 비교적 밝게 성장해 가고 있었다.
레오는 연극반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통해 아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연극반 선생님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 그 역할의 과거를 생각해 보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그러나 레오가 맡은 꼬부랑 할멈의 과거에 대해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 숙제는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한다. 레오의 여자 친구인 루비는 '당나귀' 역할을 맡았는데, 둘에게는 그 숙제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루비와 함께 자신이 맡은 역할과 다른 아이들이 맡은 역할, 그리고 연극 <룸포포의 베란다>의 미래에 대해서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분출해 낸다. 그렇게 과거를 생각하다 자신의 가족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는데, 레오는 아빠에게 어떠한 과거가 있었으며 지금도 불행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빠는 늘 음울했고, 예민했으며,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다락방에서 아빠가 14살 때 쓴 자서전을 발견하게 되고, 아빠도 처음부터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서전을 읽으면서 현재의 아빠와 과거의 아빠,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아빠의 자서전에서 로자리아 고모에 대한 글과 사진을 발견한 후 그 분이 누구일까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다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로자리아 고모가 누군지 묻게 되는데, 할머니는 바로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무슨 사연이 있다고 생각한 레오는 다음에 직접 할머니에게 로자리아 고모에 대해서 물을 기회를 만나는데, 로자리아 고모가 아빠와 친했다는 것과 부모와 연락을 끊은 채 집을 나가 여전히 소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머니는 그런 로자리아 고모를 기다리는 눈치였는데, 그런 이야기를 레오에게 털어 놓는 순간 레오가 무슨 일인가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레오는 에피소드가 있을 때마다 그 아래 자신만의 허황된 상상력을 심어 놓는다. 자신이 유명한 과학자가 되는 것, 노벨상을 타는 것, 코치가 되어 팀을 잘 이끄는 것, 로자리아 고모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 등 많은 상상력이 늘 레오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그런 상상을 읽어 나가다 보면, 나도 어릴 적에 저런 허황된 상상을 한 적이 있다는 생각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레오는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었고, 시간에 흐름에 따라 연극에 대한 자리매김도, 가족들에 대한 사랑확인도 나름대로 구축해 갈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썩 흡인력 있게 펼쳐지지 않았지만, 물 흐르듯 적정 수준에서의 분위기를 늘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레오에게 기대했던 '무언가는' 끝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어쩌면 레오의 그런 생각자체만으로도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샤론 크리치의 소설들은 늘 뒷심이 강했기에 어느 정도의 결론이 마련될 거라 생각했다. 로자리아 고모가 돌아온다든가, 레오의 헛된 상상 하나가 실현 되는 것, 아빠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것 등 나름대로 순위를 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채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다. 레오가 여전히 성장 중이고, 시간이 좀 더 흘러야 뚜렷한 형상을 드러낼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런 마무리가 더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열린 결말은 성장소설의 매력이기도 하고, 생각을 틀에 가두지 않는다는 점이 있긴 하지만 왠지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샤론 크리치의 소설은 늘 감동적이고, 웃기고, 메시지가 뚜렷했기에 레오의 이야기가 조금은 심심했는지도 모른다. 레오의 이야기 안에는 이미 충분한 삶의 모습이 녹아 있고, 어른인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흘러가는 모습에서 무언가 서운함을 느꼈나 보다. 그러나 앞으로도 샤론 크리치가 그려내는 성장소설의 세계에 계속 관심을 가질 것이며, 신간을 기다리는 묘미를 만끽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