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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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에는 휴가다운 휴가를 못 보내서인지, 여름에 대한 추억이 없다. 바닷가로 수련회를 다녀오긴 했으나, 날씨가 흐리고 추워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와서인지 휴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분위기가 완연한 요즘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보내버린 여름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이런 생각을 일깨워 주었던 것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무지개> 때문이었다. 휴가지에서 읽었으면 주인공 에이코의 심경을 더 이해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성큼 다가온 가을에 낯섦을 느끼는 소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이코의 이야기는 타히티 섬에서의 여행으로 시작된다. 맑고 투명한 바다에서 돌고래와 헤엄치며 '예쁘다'를 연발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제대로 보내지 못한 여름에 대한 개탄이 터질 만도 하다. 거기다 누구나 휴가지에 가면 한 번쯤 꿈꾸는 것이 로맨스이므로, 여름에 읽었다면 에이코의 사랑을 지켜보는 것에 좀 더 깊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붉은 태양과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는 에이코 대신, 가을을 향해가는 쓸쓸함 한 가운데 있어서인지 공감을 느끼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거기다 에이코가 차근차근 이야기해 나가는 방향을 나름대로 예측할 수 있어서 나와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타히티의 보라보라 섬에서의 에이코는 혼자 여행 중이었다. 자연을 만끽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가면서, 현제 마주하고 있는 휴양지에서의 일상과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일기를 보듯, 한 사람의 인생을 보듯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세세하게 펼쳐나가는 에이코의 이야기는 타히티 섬의 분위기 때문인지 날씨만큼 나른해 지고 있었다. 얼핏 사랑 이야기라고만 전해들은 <무지개>란 작품 속에서 저자가 어떤 식으로 그 얘기를 풀어갈지 궁금하면서도, 흩어지는 내용 때문에 감을 잡지 못해 어디에 중점을 둬야 할지 몰랐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면 그냥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하고, 타히티의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에이코의 내면의 세계를 지켜보기로 했다. 에이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가고 있었다. 어릴 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돌아가신 엄마와 할머니 이야기, 자신이 일한 레스토랑, 그리고 어떻게 해서 타히티 섬에 오게 되었는지를 차분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 가운데 다카다라는 한 남자가 등장했는데, 처음엔 그와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에이코가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다카다가 그 상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다카다와 에이코의 상황이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다카다는 에이코가 일하는 타히티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낸 식당의 오너였고, 에이코는 어머니를 여읜 후 요양이 필요해 다카다의 집에서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둘의 이야기가 이야기의 중점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너와 부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고, 조금씩 다카다에게 마음을 쏟아내는 그녀라 할지라도 타히티에서 줄곧 생각나는 사람이 다카다씨 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온통 자연과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가다 자신이 일한 일터와 타히티가 연관되어지면서 다카다가 등장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에이코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다카다씨를 좋아하고 있다고, 그와의 추억을 조심스레 꺼내놓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에이코가 마주한 사랑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곳에서의 사랑이나 헤어진 여인을 생각하는 조금은 청승맞은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다카다씨에게 마음이 쏠릴 거라고, 그를 떠올리고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타히티로 왔노라고(꼭 와보고 싶었다는 갈망도 있었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에이코의 사랑 이야기는 한 번쯤 꿈꿔보는 낭만적인 사랑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너의 집에서 집안일과 동물들을 돌보는 사이에 이미 오너와의 교류를 느꼈으면서도 오너가 그렇게 사랑고백을 할 거라 생각할 수 없었고, 에이코가 풀어낸 그 모든 이야기처럼 차분하게 둘의 사랑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너의 내면에 감춰진 사랑, 그리고 욕망, 에이코를 향한 뜨거운 마음들을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고,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내용이 아니냐고 타박을 드러낼 정도로 무언가가 어색했다. 그에 대응하는 에이코의 태도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전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어색함을 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추측대로 흘러가서 이미 한 번 뻗쳐진 편견을 거둬들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하룻밤의 꿈을 꾼 듯 몽롱했다. 에이코와 다카다, 그리고 타히티 섬 곳곳에 묻어있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흔적과 흘러간 시간들을 경험하러 온 듯한 에이코의 고백 앞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 고작 이 정도였다. 오히려 예상대로 흘러간 것에 대한 묘한 안도감과 휴양지에서 읽었다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교차할 뿐이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타히티 섬 여행을 하면서 즉흥적으로 떠올렸다고 했는데, 즉흥적으로 일어난 생각을 이렇듯 한 편의 소설로 써내는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에이코의 자잘한 일상, 소소하면서도 편안한 생각과 삶의 흐름은 일본 문학의 묘미를 느낌과 동시에 낯섦을 안겨 주었지만 오히려 그런 면이 바나나 소설다움으로 굳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바나나의 소설을 깊이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 속에는 에이코와 다카다의 사랑을 맘 기쁘게 축복해 주지 못하는 나를 만나고 말았다. 이제야 조금씩 상대방을 보면 나와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시각이 생긴 내게,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는 과정이 조금 장황스러웠다고 생각된다. 역시 사랑을 하려면 상대방을 단박에 알아보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타히티에서의 짧은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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