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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 설월화雪月花 살인 게임 ㅣ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많은 작품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가가 형사 때문이었다. <붉은 손가락>을 읽고 가가 형사가 인상 깊이 남아 있었는데, 마침 '가가 형사 시리즈'가 출간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가 형사가 처음 등장하는 <졸업>을 먼저 선택했다. 기회가 된다면 나머지 시리즈도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어서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책들은 멈춤 없이 읽을 수 있기에 손에 닿기만 하면 순식간에 읽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긴 시간을 방치해 버렸다. 막상 책을 꺼내서 읽고 보니 어떻게 이런 책을 오랜 시간 방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책을 읽고 나자 '대단하다','재미있다'라는 감탄사 보다 눈이 팽팽 돌았다. 평상시에도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데 책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과하게 눈을 굴리며 읽었더니 어지러울 정도였다. 차분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사건의 중심에서 탄력을 받으니 그 흐름을 좇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비교적 차분한 문체였음에도 오히려 그런 차분함에 감질 맛이 나서 더 빨리 좇아가려 애를 썼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범인을 예상했지만 예기치 못한 실체가 드러나 조금 놀라기도 했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유의 인간미가 느껴져 비교적 순응하여 받아 들였다. 대학 생활 4년을 마무리 하는 졸업이라는 시점을 앞 둔 7명의 친구들은 결국 4명만이 남은 채 씁쓸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고등학교 동창에다 같은 대학을 다니는 7명의 친구인 가가, 사토코, 나미카, 도도, 쇼코, 와코, 하나에는 자주 어울려 다니며 우정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커플이 형성이 되었는데 도도와 쇼코, 와코와 하나에가 커플이었고, 책의 시작에는 가가가 사토코에게 고백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가가와 나미카는 검도 부원이었고, 와코와 하나에는 테니스 부에서 활약을 펼칠 정도로 운동에 소질을 보이는 친구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대학 생활도 쇼코의 죽음으로 혼란을 거듭해 간다. 여학생들만 기숙하는 백로장에서 쇼코는 그은 손목을 싱크대에 담근 채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옆방에 기숙하는 나미카였고, 쇼코의 죽음은 자살로 판명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쇼코의 피를 닦은 흔적과 다른 방에 기숙하는 여학생이 쇼코 방을 방문했을 때와 나미카가 방문했던 모습이 달랐기에 타살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고 있었다.
모두들 쇼코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가운데 연인인 도도는 정신을 놓고 있었고, 고등학교 은사인 미나미사와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었지만, 쇼코와 가깝게 지낸 만큼 사토코는 쇼코의 사건을 해결해 보려 이리저리 조사를 한다. 가가도 자기 나름대로 사건을 조사하며 해결해 보지만 여전히 드러난 것이 없어 미궁 속을 헤맬 뿐이었다. 그나마 가가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냉철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쇼코의 죽음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펼쳐 나간다. 그러나 쇼코의 죽음이 가시기도 전에 나미카의 죽음이 연달아 닥쳐 모두의 혼을 빼놓는다. 나미카의 죽음은 더 이해할 수 없었는데, 미나미사와 선생님 집에서 다도회를 하던 중 나미카는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독극물에 의한 사망이라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다도회에서 설월화 게임을 하던 중 나미카는 죽음을 당했고, 범인은 다도회에 참여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일 터였다. 그러나 다도회에 참여한 사람은 친구들과 은사님이었는데, 도대체 누가, 왜 나미카를 죽였을까.
가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사건의 해결이 더 빨리 진행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가가는 그 자리에 없었고 사토코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에게 전해들은 것으로 추리해 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나미카는 사토코가 찻잔을 돌린 후 사망했기 때문에 가장 의심을 받고 있었다. 연달아 일어난 두 친구의 죽음 앞에 충격도 충격이지만, 범인이 친구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은 더 괴로웠다. 쇼코의 사건도 미궁에 빠진 채였는데, 나미카까지 죽자 가가와 사토코는 두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 사건이 해결되지 못할 것 같았고, 실재로 범인이라면 그들 그룹을 잘 아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그들을 용의자로 생각하며 바라본다는 것이 더 힘들었다. 가가만이 냉정하게 생각하고 추측해 나갔지만, 이번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다도회에 빠진 이상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린 느낌이었다.
저자는 사건의 실마리 해결을 위해 여기저기 복선을 깔아 놓았다. 그 복선이라는 것이 눈에 띄지 않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날카로우면서도 반듯한 가가의 인물됨을 참조한다면, 그런 분위기에 어긋난 작은 행동과 말들로 추측할 수 있었다. 인물을 묘사할 때 드러나는 작은 특징들로 조금씩 추측해 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기에 쇼코를 죽인 범인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고, 그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서 범인의 밝혀짐보다 그 과정을 풀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게 드러나므로 왜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지를 꼭 알아야 했다. 분명 사건의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설월화 게임에서 중요한 단서들이 흘러나왔을 텐데도 나는 별 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림까지 그려가며 그날 있었던 설월화 게임을 설명해 주고, 부연 설명도 따랐지만 읽는 내내 완전한 이해를 하지 못했다. 설월화 게임을 이해하기에는 내 머리 회전은 둔했고, 가가가 이 사건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가가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작은 단서들을 시발점 삼아 하나씩 구체화 해 갔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설월화 게임의 트릭을 발견한 후, 범행에 사용됐던 그 복잡한 과정을 추리해 나간다. 가가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가가의 뒤를 좇는 것만으로도 흥분 되었다. 그러나 복잡하게 풀려가는 사건의 전말이 모두 밝혀진 후에는 씁쓸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친구였다는 사실과 오랫동안 쌓아온 우정이 흔들린 것은 물론, 배신과 복수가 뒤얽힌 할큄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작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친구들의 내면의 비틀어짐, 한 순간의 실수와 욕심 때문에 세 명의 친구들은 목숨을 잃어 버렸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떠나 그들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공감이 가면서도 너무 허무했다. 한때의 열병처럼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청춘의 덫은 그들을 끝내 파멸의 길로 끌고 가고 말았다.
가가 교이치로의 활약상과 형사로써의 자질,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서 키워진 인물상을 모두 지켜보았지만 역시나 그 배경은 유쾌할 리가 없었다. 사회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교훈을 잊지 않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많은 것처럼, 가가라는 인물에 만족을 느끼면서도 가가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안타까웠다. 특히나 이 작품은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회로 막 발돋움 하려는 현실에 놓인 청춘의 비극을 다루고 있기에 안타까움이 더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가 교이치로를 주목하지 않기란 여전히 힘들다. 그가 다른 소설에서 어떠한 활약을 펼치는지, 그의 사랑, 집안 내력, 형사가 되는 과정 등이 궁금하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그 과정을 차근차근 다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