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퇴근한 뒤 집에서의 내 행동을 보면 그날의 심경을 알 수 있다. 책을 바로 펼치면 나의 마음이 가장 평온할 때이고, 책도 보지 않은 채 인터넷 서핑만 하며 시간을 때울 때는 분명 내가 피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어제가 그랬다. 월요일은 몸이 아파 누워버렸다 치더라도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화요일,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보냈다. 머릿속으로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계속 울려대는 데도 무시하고 멍하니 인터넷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순간 이렇게 하루가 무심히 흘러가는구나, 오늘도 영락없이 허무하게 시간을 때워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져 버렸다. 컴퓨터를 끄고 누워서 뒹굴 거리니 새로 정리한 책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책을 보고 있어도 손이 쉽게 뻗어지지 않아 무거운 마음에 무게만 더한 채 여전히 뒹굴 거리는 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번 주는 대대적인 책장 정리를 하느라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했다. 1,100권의 책을 빼고, 새로운 책장에 책들을 나눠서 정리하니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버렸는지 모르게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책장을 정리할 때, 침대 옆의 책장에 누워서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 닿는 곳에 읽다 만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을 배치했다. 순전히 게으른 나의 성향 때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젯밤 침대에서 뒹굴뒹굴 거리자니 내 손이 뻗치는 곳들의 책들이 계속 눈에 아른 거렸다. 마음이 몹시 무거웠음에도 멍하니 그 책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손이 뻗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최근에 읽다 만 책을 추려내니 장영희 교수님의 책이 손에 잡혔다. 아껴서 읽을 정도로 좋아한 책이었는데, 책장 정리한답시고 읽기의 흐름이 끊겨 버린 터라 서운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잘 됐다 싶어 책을 꺼내 들었는데, 왜 이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렸는지 하루가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부끄러운 생각마저 든다.

 

  이 책 속의 수필들은 모두 샘터에 연재된 원고들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보니 다양한 글이 많았는데, 저자의 일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재로 한 터라 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연재한 것들을 묶다 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졌는데 그야말로 재미나고, 슬프고, 감동적이고, 공감 가는 글까지 한 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 흡인력이 있었다. 그러다 "괜찮아" 란 글을 읽다 눈물이 나고 말았다. 저자가 어린 시절 불편한 다리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지 못하고, 집 앞 계단에 앉아 구경하고 있는데 깨엿 장수가 와서 엿 두개를 주며 "괜찮아"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담긴 글이었다. 그 이야기도 마음이 찡해졌는데, "괜찮아"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곳에서 펑펑 울어 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니 넌 절대 외롭지 않다'는 격려의 말, 이 말을 늘 내게 해주던 지인이 생각나서였다. 분명 일상을 피하고 있는 나에게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늘 엄습해 있었는데,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어디선가 나를 향해 그런 말을 해 주는 지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모른체하려 했던 내 마음을 들켜 버린 양 감정이 무너져 버렸다.

 

  그 전까지는 저자의 글이 바로 내 주변에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달착지근하게 들렸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마치 내 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착각이 일어 한 없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현재 내가 당면한 내면을 파고드는 글을 만나면서부터 저자의 글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바뀌어갔다. 그냥 흘려버리는 글들이 아니라 그 글을 쓰고 있는 저자의 내면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고(저자는 늘 마감일에 쫓겨 글 소재를 찾느라 분주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저자를 떠올리니 마치 그녀의 일기를 읽는 것만 같아 마음이 저릿해지곤 했다. 암 환자로 불리기 싫어했으나 암 투병을 하면서 죽음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던 저자의 아련함 또한 다르게 다가왔다. 글을 쓸 당시에 언젠가 올 죽음을 배제한 채 썼다 하더라도, 저자의 죽음 뒤에 만난 글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이 그녀를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는 상실감보다, 평범한 다른 이들처럼 일상의 지루함과 자신을 다독이는 내면의 갈등 속에서 생활해 가는 모습이 처연해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죽음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그녀가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다 간 흔적들이 남아 있는 일상이므로 그것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글 쓸 소재를 찾기 위해 분주한 모습, 털털한 자신의 성격, 황당한 에피소드, 마음을 찡하게 하는 자잘한 사건들은 저자의 내면을 거쳐 왔음에도 별 다른 꾸밈없이 독자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교수라는 타이틀도, 장애인이라는 덧씌워진 시선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인간 장영희를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글들이 많았다. 그런 모습 때문에 독자인 나도 맘 놓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자신의 버릇이나 소소한 내면을 토로할 때면 맞장구 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저자가 겪은 경험으로 인해 간접경험 할 수 있어 색다른 묘미를 느끼기도 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학생들의 이야기, 학교 이야기, 틀에 박힌 일상의 이야기도 많았지만 그런 글 들 사이에서도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저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저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영문학 교수이며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만으로 나름대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시선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지난한 희망을 말 할거라고, 어쩌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진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 생기 없는 눈빛으로 대하다가 5월에 소천 하셨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음에도 이제야 내게 손길이 닿은 그녀의 작품은 나의 편견을 철저히 깨어 주었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글에 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꾸밈없음, 솔직함, 더불어 독자를 평안히 이끄는 글 솜씨까지 그녀의 글 속에 녹아있는 모습은 순수한 저자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찔러댔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내 자신과 진실 되게 당면해 본 적이 있는 가란 질문이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쉰이 넘은 교수도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누구냐?" 란 소제목의 글이 나의 생각을 더 관철시켜 주었고, 토마스 머튼이라는 신학자가 했다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 것이고,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라는 말이 때 마침 내 마음에 안착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를 알았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최소한 내가 무엇을 발견해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조금이나마 해답을 찾은 셈이다. 읽는 시각에 따라서 다양한 답을 얻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문학의 매려이지만, 이 책에서 내가 찾은 질문은 내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자의 글을 통해 29살인 내가 이제야 내 자신을 찾으려 한다는 말이 철딱서니 없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저자도 나이에 상관없이, 살아온 삶의 과정에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드러냈으므로 나도 용기를 얻어 본다.). 부디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하시길 바라며, 좋은 글을 남겨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