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블루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기차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할 때, 그 기간 동안 읽을 책을 고르는 손길은 섬세할 수밖에 없다. 기차 안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는 탓에 소음이 잦기 때문에 쉽게 집중할 수 있는 책을 고르는 것이 현명하다. 읽기 힘든 책을 긴 여행 동안 읽으려고 가져갔다 소음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많기에 이제는 재미있는 책들을 주로 들고 간다. 소음을 잊어버릴 정도로 빠져들 수 있는 책. 그 책이 무엇일까 고민할 틈도 없이 미야베 미유키의 <퍼펙트 블루>를 꺼내 들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브레이브 스토리(4권)>를 만난 것이 전부였지만, 유명한 작가인 만큼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브레이브 스토리>가 큰 어필을 주지 못한 탓에 눈에 띌 만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지 못한 때에 <퍼펙트 블루>는 제 때에 찾아온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첫 장편 소설이라고 하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미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그런 작품도 아닌 초기작을 만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녀의 필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터라 약간의 거리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인해 미야베 미유키를 재조명하기 시작했고, 이제야 그녀의 히트작이 궁금해 못 견딜 지경에 다다랐다.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전작하는 작가가 많았기에 놀랄 일도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에 빠져 들 동안 굉장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등한시 하고 있었다. 그러다 <퍼펙트 블루>를 만났고, 이제야 그녀의 이름을 인지하기 바빴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반하게 되는 작품은 높은 완성도를 드러냈을 때다. 그런 작품을 만나는 기회가 그리 흔하다고 할 수 없는데, <퍼펙트 블루>는 잔잔하면서도 치밀하게 추적해 가며 완성도를 높이고 있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독자를 속도감 있는 호기심에 빠뜨리는 것도 하나의 매력으로 볼 수 있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단서를 던져주며 이끌어가는 구도가 돋보였다. 거기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들도 독특했다. 전 경찰견인 마사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인물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한다. 처음 이야기를 이끌었던 마사가 역시나 이야기를 마무리하긴 해도, 개(犬)라는 신분을 때때로 드러낼 때야 인식할 정도로 흐름은 매끄러웠다.

 

  마사는 경찰견이었지만,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고 지금은 하스미 탐정사무실에서 몸을 담고 있다. 마사는 하스미 탐정사무실에 의뢰 들어 온 가출한 소년을 데려와 달라는 일부터, 본격적인 수사를 하게 되는 과정까지 마사의 역할이 컸다. 중간 중간 개로써의 역할도 해야 했고, 독자에게 내용도 전달해줘야 하니 마치 사람인양 능청스럽게 해대는 말과 행동에 듬직할 정도였다. 처음에 하스미 탐정사무실에서 의뢰받은 일은 모로오카 신야라는 소년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신야는 마쓰다 학원 고등학교의 에이스인 모로오카 가쓰히코의 동생이었다. 천재 투수로 불릴 정도로 실력을 겸비하고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런 형에게 가출하는 동생은 골칫거리 일 것이다. 부모는 가쓰히코에게 그런 누(累)가 갈까 탐정 사무실에 의뢰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촉망받던 가쓰히코는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된다. 그 현장을 탐정사무실에 나온 하스미 가요코와 신야가 발견하게 되고 사건은 더 복잡하게 미궁으로 빠진다. 최고의 에이스로 여겨지던 가쓰히코의 죽음은 가족 뿐 아니라 수많은 야구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더군다나 가쓰히코를 죽인 사람이 한 때 같은 야구부였던 히로시 마쓰다야라는 것이 그의 자살과 유서로 드러났으므로 안타까움을 더해갔다. 그렇게 마사의 입으로 통해지던 가쓰히코의 죽음에서 잠시 시선은 기하라라는 남자로 옮겨간다. 다이도제약의 총무부 책임자라는 한직에 머물고 있었지만, 아내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남자였다. 기하라는 다이도제약이 비밀리에 실험했던 '넘버 에이트'의 부작용을 들어 협박하는 남자와의 거래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맡고 있었다. 5년 전에 죽은 한 소년의 죽음이 '넘버 에이트' 때문이었다는 협박범과 다이도제약에 숨겨있는 비밀은 가쓰히코의 죽음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다시 마사의 시선으로 돌아온 이야기는 또 다른 쟁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쓰다의 질투와 분노로 가쓰히코가 죽었다는 사실로 묻힌 듯 했으나 하스미 탐정사무실과 신야의 신변에 작은 문제점들이 일고 있었다. 누군가 추적하고 있었고, 그들을 잡고 보니 마쓰다 학원이 '고시엔' 흙을 밟지 못하도록 손을 쓴 다른 고등학교의 부원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가쓰히코는 같은 야구를 하고, 같은 청춘을 보내는 학생들의 질투와 집단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점 가운데 일어난 피해자였다. 얽히고설키는 가쓰히코의 죽음의 배후는 또 그렇게 드러난 듯 했지만, '넘버 에이트'가 수면에 떠 오른 만큼 더 복잡 미묘한 문제점이 야기될 분위기가 농후했다.

 

  한편 하스미 일행과 신야, 그리고 신야의 주변 인물들은 끈끈한 신뢰로 사건에 접근해 간다. 그런 접근방식은 독자를 차분하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만들며 사건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 주었다. '넘버 에이트'의 전말이 밝혀지고, 생각했던 것보다 가쓰히코의 죽음에는 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기까지 했다. 책이 끝날 때까지 촘촘히 조여 오는 사건의 내막은 책장을 모두 덮을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가쓰히코의 죽음에는 야구를 뛰어 넘어 인간의 잘못된 욕망과 사건 은폐, 집안 문제까지 드러나 먼 길을 돌아온 기분이었다. 기하라가 부인의 죽음을 보고 인간이 '데이터'로 용납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며 하스미 일행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만큼 가쓰히코와 마쓰다처럼 드러난 피해자가 아니라 숨겨진 데이터들이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죽음 앞에서 오로지 안타깝다는 생각만 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침체해 지려는 나의 기분과는 다르게 저자는 어둡게 사건을 다루지 않았다. 잃은 것이 있고 밝혀진 것이 있다면, 얻은 것이 있고 진실을 위해 감춰야 할 것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치명적이었던 퍼펙트 블루의 역효과는 잠시 잊은 채, 모든 일을 함께 겪은 그들이 있기에 희망을 얻어 보려 한다. 세상은 아직도 정의가 살아 있다는 조금은 진부한 결론을 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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