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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노석미 그림 / 살림Friends / 2009년 5월
평점 :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유독 기억에서 잊히지 않은 기간이 있기 마련인데, 유년 시절이 그랬다. 기뻤던 일보단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더 많지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세상을 향해 발돋움을 할 때의 기억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성장하면서 그런 기억이 자리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문학작품을 통해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때야 말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 연유로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작품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든,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든 간에 그 시절을 돌아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색다른 기쁨이 되곤 한다. 문학을 통해서 잊고 지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올려서인지 자꾸 청소년 문학을 뒤지게 되는데, 아지즈 네신의 작품으로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달에 그의 작품을 연달아 세 권이나 읽었지만, 대부분 풍자였기에 유년 시절의 추억을 꺼낼 틈이 없었다. 이번에 출간된 <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도 풍자로 채워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는데, 밤나무에서 밤톨이 떨어지듯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우수수 떨어지고 말았다.
아지즈 네신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기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한 것 보다 재미나게 읽은 풍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을 했다. 풍자의 느낌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고, 그 안에서 뼈 있는 깨달음을 얻기보다 그냥 즐기고 싶었다. 그런 즐거움을 발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탐탁지 않은 눈으로 책을 좇아갔는데 마음이 찡해지고 말았다. 아지즈 네신이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약간 알고 있었는데 저자의 글을 통해 들어보니 그 시절의 절절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더군다나 터키 작가인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 나와의 공통점, 혹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정서를 맛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부모세대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고, 종종 나와 공통된 느낌을 만날 수 있어 놀라면서도 가슴이 아릿해지고 말았다.
아지즈 네신은 짤막한 글들로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철이 없었던 시절, 가난하고 어려웠던 기억, 자신의 존재를 알고 타인의 시선을 느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라 많은 공감이 갔다. 다섯 살 때부터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시골의 넉넉지 못한 집에서 성장한 탓인지 내 기억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사탕을 사먹기 위해서 부모님의 돈을 훔친 일이나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를 때려준 일, 부끄럽고 창피한 집안일을 해야 했던 기억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누구나 겪었을 어린 시절의 이야기라고 해도 들춰내기 싫은 어린 시절이 있다. 그런 어린 시절이 생생하다 못해 아픈 기억으로 떠오를 만큼 저자는 담담하면서도 특유의 유머를 잊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겪은 동생의 죽음 앞에서는 너무 어린 나이라 미처 아픔을 발견할 틈이 없었고, 매일 친구들이 놀고 있는 공터를 지나 물을 길러 와야 했을 때는 창피해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더듬다 보면 충분히 삐뚤어질 만도 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할만도 한데, 현실에 충실한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오히려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어른이 되서도 시련을 견딜 수 있었다는 저자 앞에 경건해질 뿐이었다. 저자의 일기장을 보는 듯 한 어린 시절을 보며, 잊고 있던 유년시절은 물론 풍자 작가로만 인식하고 있던 아지즈 네신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아지즈 네신은 그런 시절을 바탕으로 반듯한 생활을 해온 반면, 동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내가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아지즈 네신을 통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유년시절의 일부분이 아니라 가족, 친구, 환경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할 수 있어 더 진화된 성장소설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미 곁길로 빠져 버린 나일지라도 내가 지내온 시절을 떠올리며 현재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