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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ㅣ 네버랜드 클래식 12
진 웹스터 글 그림, 이주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키다리 아저씨>를 봤음에도 불구하고(원작과 내용이 다를지라도), 결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 영화의 결말을 들었음에도 왜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그런 이유로 원작을 꼭 읽고 싶었는데 최근 모으고 싶은 시리즈 중의 하나인 네버랜드 클래식에서 나온 <키다리 아저씨>를 발견하고 바로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분이 오묘해지는 금요일 저녁에 책을 꺼내들었다. 이런 밤에는 제격이라는 생각에 부흥하듯 책은 단숨에 읽혔다.
제루사 애벗(주디)이 고아원 평의원인 한 사람(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는 사연 이후에는 모두 편지로 채워져 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평의원에게 매달 편지를 써야 하는 주디는 얼핏 보았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키다리 아저씨'라는 애칭을 붙인다. 18년 동안 고아원에서 자란 주디에게 대학 생활은 그야말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학비와 기숙사비, 거기다 매달 용돈까지 보내주는 키다리 아저씨 덕분에 주디에게 대학은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피붙이 하나 없던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자주 편지를 쓴다. 대학생활의 벅찬 마음, 자신의 생활 보고報告, 하루하루 펼쳐지는 행복감을 키다리 아저씨에게 전해준다. 편지 속에는 주디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책을 읽기 전 해설을 읽은 터라 키다리 아저씨가 누군 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디와 주디의 일상에 종종 나타나면서도 편지로 주디의 마음을 알고 있는 키다리 아저씨(저비스)를 훔쳐보는 것은 또 다른 설렘을 안겨 주었다.
주디의 편지를 보고 있노라면 한 소녀가 어떻게 성장해 가고, 무슨 생각을 품고 있으며,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 개척해 가고 싶은지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주디에게는 '키다리 아저씨'가 고마운 분이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고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때론 답장을 요구하기도 하고, 키다리 아저씨의 말을 듣지 않으며, 키다리 아저씨가 퍼부어 주는 사랑에(선물도 포함) 버릇없어 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었으며 여자인 내가 편지를 보고 있어도 주디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주디가 하루하루 성숙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 키다리 아저씨인 저비는 어땠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이 자연스레 그려질 정도였다.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며, 훌륭한 사람이 되어 꼭 은혜를 갚겠다던 주디. 편지 속에는 자신이 만들어가고 싶은 미래도 늘 포함되어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에게 쓰는 편지지만, 일기장이라도 해도 될 만큼 순수하고 솔직한 주디의 편지는 지금껏 고아로 보낸 우울함이 많이 깃들어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머가 가득하고, 가식이 없으며, 자신의 일상과 함께 수록된 작은 그림들은 너무 귀여워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 물론 대학에 와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갖추지 못한 상식과 빈부차이가 심한 친구들 틈에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우울함이 아닌 자신에 대한 재조명을 하기 위해 키다리 아저씨께 모든 것을 털어 놓는데, 언급만 했다 하면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에게 선물을 보내주곤 했다. 감사히 선물을 받을 때도 있지만, 옳지 않다며 돌려보내면서 단점을 스스럼없이 말하고 자신이 누리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망치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 하나하나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순수해서 내 마음이 맑아질 때가 많았다.
시간은 흘러 드디어 주디는 대학을 졸업한다. 자신의 졸업식에 꼭 와주십사 부탁을 했건만 키다리 아저씨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친구 줄리아의 삼촌 저비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못 올만도 했는데 주디는 큰 실망을 한다. 그럼에도 저비가 자신에게 청혼을 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저비이나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며 키다리 아저씨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는다. 청혼을 거절한 이유를 알게 된 키다리 아저씨는 자신을 만나러 오라는 전갈을 보내고, 키다리 아저씨가 누군지 알게 된 주디는 큰 행복에 빠진다. 이제야 두 사람의 역할을 한(키다리 아저씨이자 사랑하는 저비 도련님), 한 사람에게 마음을 드러낸 편지를 쓰며 책은 끝을 맺는다.
순식간에 읽었지만 여운은 참 오래 남는 소설이었다. 늘 이런 사랑을 꿈꾸고 있지만, 주디처럼 자신을 알아가고 사랑할 줄 모르는 내가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인생에서 주디의 키다리 아저씨처럼 영원한 지지자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그 사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 다가오도록 괜찮은 나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능력을 모를 때만큼 사랑스러운 모습도 없다고 했으니, 내가 모르는 나의 또 다른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은 내면을 가꾸는 것이며 주디처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