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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아지즈 네신의 작품을 읽으니 다른 작품도 읽고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책장을 뒤져보았다. 풍부한 책을 자랑하고 있는 책장에서(도대체 언제 다 읽을는지) 아지즈 네신 책 두 권을 찾아내 바로 읽었다. 직전에 저자의 풍자소설을 읽은 터라 이 책도 비슷한 책인 줄 알았다. 서문을 보고 아지즈 네신이 유배 생활에 대한 회고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세 번째로 만나는 그의 작품이지만 각각 성격이 다른 작품 세계에 놀라움을 드러냈다. 작가 소개를 통해 글쓰기의 범주를 알았지만 직접 마주하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밀려온다.
간단한 책 소개를 보고 암울한 내용일 거라 단정 지었다. 작가가 유배 생활을 했다면 유쾌한 내용을 아닐 테고, 짐짓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생각하며 그와 비슷한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러나 아지즈 네신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섣부름도 잠시, 저자의 힘든 유배 생활에 아랑곳없이 즐겁게 읽고 말았다. 저자 자신도 '고통스럽던 시절도 세월이 흘러 추억으로 회고될 때는 조금은 달콤하게 떠오르는 법'이라 했으니 유쾌한 마음으로 저자의 추억을 따라갔다. 유배지의 도착으로 시작을 알리는 책장을 조심스레 넘기다 킥킥거리며 읽는 나를 보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의 글에는 익살이 넘쳐났다. 풍자 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답게 유배 생활을 회고하는 글에서도 재치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유배 생활은 처절했다. 관광을 온 것도 아닌 낯선 도시에서 생활이 편할 리 없겠지만,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알려진 자신의 이름과 유배를 왔다는 딱지는 늘 붙어 다녀 모든 사람들이 그를 회피했다. 친구들은 물론, 낯선 사람들까지 저자를 피하는 통에 고충은 더욱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관할 파출소에 매일 사인을 하러 가야 하는 일 이외에 특별한 일거리가 없는 그는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고, 힘겹게 받는 지인들의 보조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책의 전반부에 걸쳐 드러난 그 시절의 배고픔을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의 제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누구나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환경 가운데도 저자는 꿋꿋했다(꿋꿋함을 빼면 유배 생활에 남는 게 없었다). 오히려 독자를 안심시키고 위로하듯 유배 생활의 일부를 솔직하지만 처지지 않도록 써내려 간다. 저자의 고충이 가슴 시리게 다가오면서도 유배 생활을 견뎌 낸 시간을 회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지켜보는 것 밖에 없지만, 그런 지켜봄을 통해 오히려 내가 더 즐거워졌다. 특히 저자가 유배 생활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본 온천에서의 일화는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웃다가 서럽게 운다는 웃음을 실감하게 되는 사연이었는데, 이미 지난 일이니 무거운 마음은 털어내자는 생각으로 마냥 즐겁게 웃었다. 그런 사연을 이렇게 쓸 수 있는 저자에 대해 경외감과 함께 꿋꿋하게 잘 견뎌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자신을 배척하고 이용하며 벌레 보듯 피하는 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이은 있었고, 나름대로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날을 기다리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런 마음으로 버텨낸 시간들은 참으로 귀중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기관이나 사람들에 대해 비난을 하기보다 현재에 충실한 모습(늘 배고프다는 소리조차) 자체가 희망이 되어 주었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유쾌하게 써 내려간 필치도 한 몫 했지만, 자신의 아픈 과거를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되레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개정판을 내면서 자신이 왜 유배를 떠나야 했는지에 대해 말함으로 책은 마무리 된다. 그 이유라는 것이 지금은 이해를 이끌어 내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난처한 상황에서 진정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런 힘들었던 세월을 이겨낸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을 통해 삶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시각을 키워야 한다. 웃다가 넘겨버릴 수 있는 책이지만, 좀 더 깊은 곳을 내려다보면 숨겨진 또 다른 의미를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보며 현재의 세계의 자유를 만끽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