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만 봐도 수학에 관한 내용이 나올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어떤 지인은 내가 수학을 무척 싫어하는 것을 알고 이 책을 통해서 수학과 좀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치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가 들려 왔지만, 내가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 어떠한 의견을 말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 책을 통해서 수학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갖게 될지,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감동을 받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책들은 절반쯤 그 가치를 깍이고 내게 오기 때문에 이 책도 선뜻 손길이 가지 않았다. 약간의 두려움과 거부반응이었을까. 혹시 남들처럼 깊은 감명을 받지 못할까봐 미리 걱정하는 것이었을까. 어느 것에도 무게를 실을 수 없었지만, 이런 걱정들 때문에 금방 읽을 수 있는 책 임에도 계속 머뭇거렸다.

 

  파출부로 근근히 생활을 연명해가다 우연히 박사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된 주인공. 47살에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수학 교수인 박사. 박사가 무한한 애정을 쏟게 되는 주인공의 아들 루트(박사가 머리모양을 보고 지어줬다.). 세 명이 만들어내는 우정과, 수학과 야구 얘기는 딴 세계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박사의 기억력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것과, 박사가 교통사고를 당한 시점인 1975년에 멈춰진 기억력 때문일 것이다. 루트의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박사를 마주해야 했다. 그런 박사를 감당하지 못해 이미 9명의 파출부가 거쳐 갔지만, 그녀는 박사의 집에서 일하며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거북하지 않았다.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당사자인 박사였고, 박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기 보다 박사의 특별함이 싫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박사를 통해 배우는 것, 박사의 수학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흥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안 박사는, 자신이 매일 입는 양복에 수 많은 메모지를 붙여 놓는다. 보통 사람이 알아 먹을 수 있는 메모지는 몇장 되지 않고, 수학에 관한 기괴한 메모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박사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메모는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였다. 그만큼 자신이 이상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별 도움이 안됐다. 박사의 애정을 한껏 받는 루트와 그의 엄마는 모종의 합의를 통해 박사가 자신들을 처음 보는 사람 취급을 해도, 1975년이후로 바뀌어 버린 여러가지에 대해 말할 때(특히 박사가 좋아하는 야구선수 에나쓰에 대해) 조심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박사를 잘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은 두 모자母子였으며, 박사도 그들 앞에서 80분의 기억력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루트의 엄마에게 숫자에 관한 기괴한 질문을 하지만(신발사이즈,생일,전화번호 등), 박사에게 그 숫자들은 단순한 수가 아니라 아름다운 수의 나열이었고 규칙이었다. 박사가 수와 수사이의 규칙과 학설에 대해 설명을 하면 듣는 이에게도 이미 아름다운 수의 이야기였다. 루트에게도 언제나 쉽게 수학을 가르쳐 주었고, 나처럼 수학에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루트 엄마도 박사의 가르침(?)을 통해 수에 관한 순수한 관심을 갖기도 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것이 소설인지 수학에 관한 책인지 잠시 헷갈릴 때도 있었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에 거의 전무하기에 눈에 들어오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학에 관해 설명해 가는 방식이 다르게 생각되었다. 박사가 설명하는 수식을 그리거나 표시할 때 책의 공간이 좁다는 느낌. 그 느낌은 이미 박사의 설명으로 인해 수의 아름다움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갖는 느낌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표기한 것이지만, 이미 박사를 통해 수에 관한 무한한 상상력을 가진 탓에 글자와 글자 사이에 갇힌 다른 기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거나 수학을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부감이 약간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박사가 갖는 수에 관한 사랑은 그 정도로 호소력 있었고, 수에 대한 매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열정이 있었다. 불행한 사고가 아니었다면을 가장하는 것보다 박사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에 관한 사랑을 느껴가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꾸 허약해지고, 80분의 기억력이 나아지지 않는 박사를 바라보는 마음은 안타까움이 컸다. 언제까지고 루트와 루트의 엄마와 함께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박사에게 남겨진 삶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박사에겐 80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새롭지만, 그 새로움에 어느 정도 정착한 세 사람에게 익숙함이 어긋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박사를 돌보고 있는 미망인인 형수와의 미묘한 관계의 궁금증은 한 장의 사진으로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둘의 사이를 짐작할 뿐, 더이상 파고들 수도, 그러지도 않았다. 결국 박사는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그의 곁은 미망인이 지켰다. 루트와 루트의 엄마는 거의 10년의 세월동안 박사를 방문한다. 루트가 어른이 되고 수학 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박사는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박사의 집에서 함께 했던 추억이 있다. 한 번뿐이었던 야구장 관람, 루트가 다쳤던 일, 루트의 생일 파티와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자잘한 일상들이 남아있으므로 추억으로 박사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숫자를 바라볼 때, 박사와의 일화가 떠오를 때마다 그 추억은 생명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서문에 염려했던 걱정은 사실로 드러났다. 깊은 감동을 받지 못한 것,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에 대한 후련함. 그 외에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걱정투성이로 시작되었던 읽기는 그렇게 끝나 버렸다. 그렇지만 희미하면서도 끈질긴 여운은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박사의 집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 속에 드러났던 묘사, 박사의 외모를 상상해 보는 것, 깜깜한 머릿 속에 수의 아름다움을 떠올려 보는 행위는 끊이질 않았다. 박사와 함께 한 세월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요양원을 들어간 이후나, 미망인과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이 아쉽긴 했어도 루트와 루트 엄마처럼 박사를 추억할 거리는 충분하다고 본다. 책을 다 읽어 버린 순간에는 별 감흥이 없어 아무 생각 없이 덮어 버렸지만, 소소한 일상들이 나의 머릿속을 파고 들고 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지워지지 않는 여운 때문에 이 작품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셋의 우정을 나 혼자서 지켜보고 싶은 욕심. 그 욕심 때문에 마음을 툭 터놓지 못했다 해도, 조금이나마 여운의 감동을 순간순간 느껴가고 있다. 시간이 흘러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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