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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 특별판 ㅣ 트와일라잇 1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변용란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그날 밤은 몹시 지쳐 있었다. 몸도 피로했고, 정신도 흐트러져 나약한 생각들이 나를 파고 드는 밤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늦은 밤. 그런 나를 잊고 싶을 정도로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날 내게 도착한 10권의 책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이 책에 눈길이 꽂혔다. 10권의 책 중에서 가장 두꺼워 읽기가 싫었는데, '최강 로멘스'라 칭찬했던 몇몇 지인들의 말이 떠올라 꺼내 들었다. 그런 책이라면 분명 빠져들 수 있을테고, 요즘같이 마음이 헛헛할 때는 로멘스도 괜찮다 싶었다. 그런 깨달음이 좀 빨리 오면 좋으련만. 꼭 잠들기 전인 깊은 밤에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러다 흡인력 있는 책을 만나게 되면, 늦게 자고, 다음 날 피곤해 할꺼 뻔하면서. 역시나 이런 후회는 새벽이 되어서야, 졸려서 책을 덮지 않을 수 없을 때야 뒤늦게 하게 된다.
미친듯이 책을 읽었지만, 절반 밖에 못 읽었는데도 시간은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중요한 사건도 어느 정도 지나가고, 로멘스도 넉넉히 즐긴 터라 책을 덮었다. 퇴근 후 고요한 시간에 방구석에 틀어 박혀 읽고 싶었지만,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면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가방에 넣고 말았다. 사무실에서 이 책을 펼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은 펼쳤고 빠져 들어 버렸다.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어 다음 시리즈를 주문해 놓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지금 당장 다음 책을 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꼼짝없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현실이 공허하게 다가왔다. 이 책에 마음을 뺏긴 내가 한심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잠시나마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여겨지기도 했다. 어차피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상상속에서라도 실컷 꿈꿔 보고 싶었다. 여자 주인공은 잠시 밀쳐내고, 남자 주인공의 눈빛을 내게로 돌려놓는 말도 안되는 설정을 해 놓은채로 말이다.
이 책의 저자가 여자라는 사실이 책 속에 속속들이 드러났지만, 그 사실이 무척 감사했다. 많은 여성들이 어떤 로멘스를 꿈꾸는지, 어떤 상황을 좋아하는지 안다는 사실 때문일까. 섬세한 묘사를 뒷받침 해주는 세세함이 허영을 몽땅 불어 넣어 주었지만, 여심을 휘어잡는 매력을 거부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뱀파이어라도 해도 장생긴 외모,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미소, 정신을 혼란하게 하는 눈빛이라면 어떤 사람이 거부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 온통 자신에게 빠져 있는 남자라면 더할나위 없는 헛된 상상에 온 몸과 마음을 맡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이렇게 감칠맛 나게 써 내려가다니. 설레임에 몸부림 치며, 나의 예상대로 흘러가주는 뻔한 스토리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1901년 태생인 에드워드 컬렌과 17살 소녀 벨라.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면서도 빠져듬을 멈출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정체를 들통나지 않기 위해 독특한 가족 구성원들과 포크스에 정착했고, 벨라는 재혼한 엄마를 떠나 아빠가 살고 있는 포크스에 오게 되었다. 어린 나이로 보여야만 한 곳에 오래 정착할 수 있다던 에드워드는 고등학교에 재학중이었고, 벨라는 전학을 온 터라 그들의 첫 만남은 학교였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순탄치 않았다.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빠져들 수 밖에 없는데, 에드워드는 벨라를 벌레보듯 한다. 그러다 벨라가 차에 깔릴뻔 한 일이 생겼고, 에드워드는 순식간에 나타나 벨라를 구해준다. 그런 일들이 조금씩 쌓여 가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에 대한 수 많은 궁금증을 안고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힘에 빨려들고 만다.
위험할 때마다 자신을 구해주고 한없이 감미롭게 헌신을 다하는 에드워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벨라는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드러나는 이상한 능력, 들려오는 소문을 간추리고 직접 물어 알게 되었지만,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기에 벨라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착한(?) 뱀파이어였고, 그녀의 피를 너무도 원하지만 벨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절재해 간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흘러가는 둘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조차 무기력하게 다가왔다. 그로인해 벨라의 가족과 에드워드 가족을 잃을 뻔하고, 벨라의 목숨까지 위험해 지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에드워드를 벨라는 거부할 수 없었다. 90년만에 첫 사랑을 하게 된 에드워드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생명이라는 고백과 함께 벨라를 깊이 사랑하고 지켜준다. 벨라는 에드워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둘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을 에드워드는 너무도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벨라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 이 세상 모든 걸 다 합친 겁보다 사랑하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냐는 에드워드의 말에 벨라도 동조할 수 밖에 없었다.
둘의 사랑놀음에 깊은 대리만족을 하면서도 약간은 진부하기도 했지만, 풋풋한 마음을 찾아 나서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빠져드는지,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지를 훤하게 꿰고 있는 저자와 곧바로 행동을 취하는 에드워드 덕분이었다.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서 위험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것이 아닌 순수하고 세상에 존재 이유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시련과 위험이 어느정도일지 상상할 수 없지만, 1권에서는 모든 위험요소를 덮어 버릴 만큼 둘의 사랑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스토리의 흐름과 결말도 중요하지만, 철저히 과정을 즐긴 책이었다. 책의 곳곳에 나의 감정을 흩부려 놓아 자꾸 떠들러 보고 싶을 정도로 내가 만들어 놓은 달콤한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사랑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이런 환상을 키워가느라 사랑을 못하는 것일까. 어떠한 질문도 대답이 되어 주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하나된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