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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것은 10년 전이다. 당시에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인기가 지금처럼 높지 않아서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하필 리뷰를 남기지 않은 기간에 '키친'을 읽어서 책 내용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뒤로 세 권의 책을 더 읽었지만, 바나나 책을 직접 구입해서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묘한 감정이 벽을 만들고 있는 부족함. 누군가 내게 바나나 책을 선물해 준다면 열심히 읽어보겠다는 속물근성만 드러내고 있던 찰나, 드디어 내 손에 두툼한 바나나 책이 쥐어졌다.
지금껏 얇은 책만 읽어서인지 500페이지에 달하는 바나나 책을 보고 있자니 읽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두껍긴 했지만,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담없이 펼쳐 들었다. 나의 예상대로 책장은 편안히 넘어갔고, 이런 느낌의 책은 두께와 상관없이 평이하게 만끽할 수 있었다. 바나나 특유의 흡인력과 함께 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너무 빨리 읽어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 속의 인물들과 함께 한 기억 때문이지만, '암리타'는 줄거리보다 소소한 감정의 나열이 더 많았던 책이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감정속에 파묻히다 보니, 나의 단면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책의 줄거리는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던 주인공 사쿠의 가족과 주변인물들이, 뒤로 갈수록 독특함에 날개를 단 듯 더 가관이 되어간다고나 할까. 애매모호한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지, 낯선 느낌들이 나를 훑고 있을 뿐이었다.
큰 사건들이 드러나지 않을 때는 사쿠의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 어느정도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나와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세계에서 충분히 마주할 수 있는 인생이라 착각하면서.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을 거라는 생각에 특별한 흐트러짐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타나는 사쿠의 동생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상상보다 말도 안된다는 현실감이 더 밀려왔다. 소설을 소설로 보지 못한 이유는 사쿠의 내면을 통해 전달된 일상과 생각들이 친근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삶에서 느껴지는 지극한 현실감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현실적인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 만나게 되는 거부감인지도 몰랐다.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대했음에도,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평행적인 흐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쿠는 엄마와 배다른 남동생, 사촌 여동생, 집을 나온 엄마의 친구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아빠가 같은 여동생 마유는 자살했고, 여동생의 남자친구였던 류이치로와 미묘한 관계속에 있다. 책은 마유와 류이치로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간단하게나마 사쿠의 현재를 정리해놓고 보면, 특별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굉장히 특별할 수도 있는 상황을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소소한 감정을 다 쏟아부으며 얘기하고 있어서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전개는 더뎠다. 사쿠의 머리속에 꽉 차 있는 수 많은 상념들을 쏟아내느라 줄거리를 추려 내기가 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쿠의 주변은 평범함을 넘어 비현실적인 세계로 노선을 갈아타고 만다.
첫 낌새는 초등학생인 동생 요시오의 변화에서 찾아온다. 평범하기만 한 요시오는 어느날부터 소설을 쓴다고 방에 틀어박히더니, 급기야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사쿠가 동생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을 직접 보여준 일화 때문이었다. 어떤 현상을 미리 보고,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초등학생인 동생에게 나타난 것이다. 살짝 판타지적으로 흐를 수 있었던 분위기를 어느정도 잡아주었던 것은 사쿠였다. 책의 곳곳에서 중재자 역할을 감당했던 사쿠는 동생의 상태에 대해 흥분하거나 좌절하지 않았고, 멘토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최선을 다해갔다. 자신이 머리를 다치고 부분부분 기억을 잃어버린 후에도, 동생의 능력을 알아보며 진솔하게 대해주는 사람들 앞에서도 담백하게 동생을 대해 주었다. 그런 사쿠가 있었기에 요시오의 광활한 내면이 많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엄마나 주변사람이 보기에 걱정스러울 행동을 하긴 했지만, 동생의 내면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에 묵묵히 도와줄 수 밖에 없었다.
동생과 류이치로를 통해 알게 된, 혼을 알아보는 사람과 독특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서도 사쿠는 묵묵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쿠의 주변에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런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과 지극히 평범한 자신과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 틈에서 사쿠는 잘 어울렸다. 많은 일을 겪고, 여러가지 변화를 거치면서도 그녀가 그렇게 느껴졌던 것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대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행 속에서도,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가운데서도, 집안의 변화에 대해서도 사쿠는 자신을 늘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없이 쏟아내는 감정들이 그것이었고, 특별한 일들 가운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냈다. 수없이 얽혀있는 사람과 사람, 혼과 넋,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은 그렇게 또다른 조용함을 간직한 채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면 변화가 찾아오는 것처럼, 사쿠의 주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결말이 무척 궁금했었는데,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똑부러진 결말이 아닌 흐르는 그대로 마무리 지어졌다. 어느 순간 그 뒤를 이어 글을 써 내려간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흐름. 사쿠와 류이치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혼란을 거듭하고 어떤 것이 최선인지 모를 요시오의 문제는 의외로 싱겁게 흘러갔다. 신비한 능력이 쇠퇴해 갔고, 중학교에 다닌 뒤 탁구에 빠져 과거의 요시오를 떠올릴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기억이 되살아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쿠의 모습이 담담했다.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너무 서정적이라고, 혹은 너무 주관적이라고 생각했던 얘기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쿠가 기억을 잃어버린 뒤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인생은 앞서서 전진하는 것 같았다.